먼 길에서 띄운 배


                        박남준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긏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요


흘러가겠지요
이미 저는 잊혀진 게지요
아 저의 발길은 내일도
배를 띄운 강가로 이어질 것이어요
............................................................

그렇게 강물은
시간은
추억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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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쓸쓸하던 풍경


                          박남준

 
길섶에 쑥부쟁이 하얀 취꽃 자욱하게 눈물지고요
한 세월 백발의 머리 풀던 억새들의 목 긴 행렬이
상여길로 서럽게 밀려왔어요
이제 와서 옛사랑을 잊는다고 그리 잊혀지는가요
이름 부르며 이 들길을 걸어 첫눈이라도 올 듯한데
단풍의 숲은 두 눈을 가려 막막한 길을 묻고
옛날은 오지 않는 님처럼 그리웠어요
............................................................

쑥부쟁이와 억새와 바람의 가벼운 실랑이
가. 을. 비. 사이로
써억, 다가서는 겨울 걸음걸이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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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박남준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 내리듯
구멍가게 셔터문이 내려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도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리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 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발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발 실을 수 없겠다.
...............................................................................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막차를 기다리는 일...


기다렸던 것만이 가슴에 남아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하는...


알면서도 살고,
모르면서도 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돌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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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배 접어


                             박남준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이고 천날 흰 종이배 접어 띄우면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먼 바람결로도 꿈결로도 오지 않는
아득한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 삼백예순다섯날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바람 같은 당신께로 가는 사랑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날마다 고이고이 접어

종이학 천 마리를 유리상자에 하나 가득 담았다.

그 속엔 온갖 사연들이 접혀 있어

일일이 다 얘기할 수가 없다.

종이배를 그리움 가득 담아 접고,

강물에 띄우는 것은

어쩌면 내 마음을 접어두는 일...

꿈결로도 오지 않는 당신을 접어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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