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신용목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키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었다
............................................................................................................................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닷물에 수장된 수백명의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이,
이 땅의 어른임이 너무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한동안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고개 숙여 다시 그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희덕... 걸음을 멈추고  (0) 2014.06.17
백석... 비  (0) 2014.06.03
한하운... 무지개  (0) 2014.04.21
오세영... 편지  (0) 2014.04.11
심재휘... 봄날   (0) 2014.04.10

소사 가는 길, 잠시


                             신용목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는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

지나가는 시간,
지나가는 풍경,
지나가는 사람...


무심코 지나쳐버린 일상이
멈춘 채, 몇 줄의 글로 빼곡히 박혀있다.
기억조차 희미한 시간, 공간, 그리고 이름들...


나는 어떻게 그 곳에 혹은 그들에게 남겨져 있을까?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동순... 화로  (0) 2013.02.05
이해인... 겨울길을 간다  (0) 2013.02.04
김기택... 가시   (0) 2013.01.29
유용선...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0) 2013.01.23
김혜순... 우리들의 음화 (陰畵)  (0) 2013.01.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