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유한함을 알기에 더 소중해진 하루
지는 꽃 잎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서둔다.


옥석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흔한가?
수시로 색이 변하는 저 나무며 숲이며
잃어버리고,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오면
그리하면 되는 것.


행여 시들까 염려하는 지금
근심하며 보내버리는 시간
아껴야 해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꽃 잎
딱 한 잎만
사랑이라 믿고
책장 사이 넣어두자.
오늘은 그리하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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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

오늘도 비

이어지는 비에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고

 

오랜만에 차를 한 잔 해야겠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고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누린 것이 언제였지

한동안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지

 

여유로움은 어쩌면

무수한 번거로움이 주는

작은 혜택

 

오늘은 기어코 차 한 잔 마셔야겠다

 

이것 저것 꺼내고, 챙겨 놓고, 물을 끓이고, 차를 꺼내고, 찻잔을 닦고

채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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