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오탁번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부채질 하며
말복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달려오던 빨간색 자동차가 끽 멈춰 섰다
운전석 차창이 쑥 열리더니
마흔 살 될까말까 한 아줌마가
고개도 까닥하지 않고
-할아버지! 진소천 가는 길이 어디죠?
꼬나보며 묻는다
부채를 탁 접으면서 나는 말했다
- 쭉 내려가면 돼요, 할머니!
내 말을 듣고는
앗, 뜨거!놀란 듯
자동차가 달아났다
 

우리나라에는
단군할아버지 말고는
'할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관순 누나 생각하면
나는 어린이집에도 아직 못간
앱솔루트 분유 먹는
절대적인 갓난애야!
'할아버지'라니?
고얀 년 같으니라구!
..............................................................

말로 독침을 쏘는 것들

 

말벌보다 독한 침이 머릿속에 박혀
뺄 엄두는 못 내고
맹독이 자꾸만 온 머리로 퍼져
편두통과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내 입에 똥칠하기 싫어
각각 좌우측 침샘에
말끔히 묻어뒀던 쌍 욕이 스며 나오고
안면 근육 경련에 동반하여
쌍 주먹으로 이어진 인대가 발작한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쌍 주먹을 날린 후
쌍 욕 더미에 파묻어 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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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오탁번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아
삼겹살 곱창 갈매기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며 노래했는데
봄 여름 지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간 영안실에서나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식구로 맞이하는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자주 만나자고
헛 약속한 친구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만이랴

...................................................

언젠가부터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다음엔 꼭 만나자 약속하던 손길이
마지막 온기였던 적도 있다.


이젠 그런 헛 약속이 더 많아지겠지.
그래도...
또 만나자 약속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는 안되겠지.
그러면 더 서운하겠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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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지

                       오탁번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먹겠네

.........................................................

 

아버지와 목욕탕 갔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아버지 고추는 크고 내 고추는 작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몸을 움츠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목욕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다.
오히려 그때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오늘은 아들과 목욕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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