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는 일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

언젠가부터 내 안에는
작은 새가 한마리 산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새벽을 맞아
내 의식을 깨우고
밤을 기다려
모두가 잠든 후에야
비로소 쉬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너를 맞아
눈 뜨게 하고
너를 만나
비로소 숨쉬게 하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신의 소리를 듣고
모든 깨어있는 감각으로
내게 전달하여
허락하신 하루에

제 스스로 감사 기도 올리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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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애인


이생진


시 쓰는 이는 사랑하기 좋겠다
사랑을 알고 시를 쓰니까
그래서 따라온 여인
따라오면서 실망했다
사랑은 하지 않고 시만 쓰는 시인을
바닷가에 버리고 왔다
알고 보니
시 쓰는 이의 사랑은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
........................................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기의 몫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지의 문제는
안타깝게도 전적으로 상대방의 몫으로 귀착된다.


먼 길을 동반하려면 이해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타깝지만 빨리 이별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낫다.
그의 무엇 때문에 그가 좋다고 생각된다면 얼른 복기해봐야 한다.


내가 그의 모든 것을 믿고 이해햐려 하는지...
내가 정말 그를 사랑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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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


                      이생진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커가며 부처를 닮았다
숱한 이파리를 훌훌 벗어 버리고
가을엔 해탈 지경
그러나 초봄엔
다시 살겠다고
몸부림칠 것같다


오전 열 시의 겨울 햇살은
모두 도선사 뜰 안으로 모이고
대웅전 부처가 빙그레 웃으면
촛불이 그것을 수긍하는 몸짓을 한다
참회도장 앞뜰에
장독이 이 백 스물 하나
모두 뚜껑을 쓴 부처 같다
하지만 그곳에 합장하는 이 없다
.............................................................................................

 

 

삶의 길이 곧 도(道)의 길이라서
그 길이 결코 다르지 않다.
도(道)가 곧 길이니 더욱 더 그러하다.


믿음의 근본도 다르지 않을텐데,
생각해 보니 나도 장독대에 합장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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