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이재무


늦도록 내 눈을 다녀간 시집들 꺼내놓고 다시 읽는다
한때 내 온몸의 가지에 붉은 꽃 피우던 문장들
책 속 빠져나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울음은
그저 울음일 뿐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못한다
마음에 때 낀 탓이리라 돌아보면 걸어온 길
그 언제 하루라도 평안한 날 있었던가
막막하고 팍팍한 세월 돌주먹으로 벽을 치며
시대를 울던, 그 광기의 연대는 꿈같이 가고
나 어느새 적막의 마흔을 살고 있다
적을 미워하는 동안 부드럽던 내 마음의 순은
잘라지고 뭉개지고 이제는 적보다도 내가 나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도 그 누구처럼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돌멩이를 쥘 수가 없다
과녁이 되어버린 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동안
뿌리 잃은 가지처럼 물기 없는 나날의 무료
내 몸은 사랑 앞에서조차 설렘보다는
섹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질 좋은 밥도
마음의 허기 끄지 못한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늦도록
잘못 살아온,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운다

...............................................................................

무엇 하나 올곧게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두루뭉술...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반문해보니
역시 어정쩡한 대답이 돌아온 듯 만듯 되돌아온다.
늦은 밤,
시인의 회한이 한줄 한줄
고스란히 내 맘에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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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로 서서


                      이재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다.
여름날 생의 자랑이었던
가지의 꽃들아 잎들아
잠시 안녕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을 위해
지금은 작별을 해야 할 때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분분한 낙엽,
철을 앞세워 오는 서리 앞에서
뼈 울고 살은 떨려 오지만
겨울을 겨울답게 껴안기 위해
잎들아, 사랑의 이름으로
지난 안일과 나태의 너를 떨군다.

.......................................................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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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

난 절대 남겨지지 말아야겠다.

 

내 가슴...

내 심장이 제발 더 이상 새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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