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아무래도 잦아졌다.


만나는 것은 갈수록 어렵고,
헤어짐에도 많이 무뎌졌다.


소중하지 않았던 만남이 있었던가?
또 어떤 헤어짐이 그리 사소하였던가?


그 많던 꽃
다 지고,
초록 세상이 되는데,
겨우 보름 남짓 걸렸다.


이 초록은 얼마나 호사를 누리려는지...

오늘은 그 흔하던 꽃 잎을 눈씻고 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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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유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수 있는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오랜만에 집까지 찾아온 친구,
마주 앉아 한 잔 한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펼쳐놓고
쫓기는 일상과 팍팍한 인생 이야기를 안주 삼아
한 잔 또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했다.


어느새 목전까지 오른 취기와 몰려드는 피로를

못 이기고
스르르 기울어지는 녀석의 머리를 받아 자리에

바로 눕힌다.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코를 곤다.


그래, 친구야.
사느라 고생이 참 많다.


다시 혼자 남은 술자리,
술잔이 자꾸 흐려진다.

Personal Computer


                                최영미


새로운 시간을 입력하세요
그는 점잖게 말한다


노련한 공화국처럼
품안의 계집처럼
그는 부드럽게 명령한다
준비가 됐으면 아무 키나 누르세요
그는 관대하기까지 하다


연습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메뉴로 돌아갈까요 ?
그는 물어볼 줄도 안다
잘못되었거나 없습니다


그는 항상 빠져나갈 키를 갖고 있다
능란한 외교관처럼 모든 걸 알고 있고
아무것도 모른다


이 파일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그는 정중히 거절한다


그렇게 그는 길들인다
자기 앞에 무릎 꿇은, 오른손 왼손
빨간 매니큐어 l4K 다이아 살찐 손
기름때 꾀죄죄 핏발선 소온,
솔솔 꺾어
길들인다


민감한 그는 가끔 바이러스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쿠데타를 꿈꾼다


돌아가십시오 ! 화면의 초기상태로
그대가 비롯된 곳, 그대의 뿌리. 그대의 고향으로
낚시터로 강단으로 공장으로


모오두 돌아가십시오


이 기록을 삭제해도 될까요 ?
친절하게도 그는 유감스런 과거를 지워준다
깨끗이, 없었던 듯, 없애준다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그대에게


어쨋든 그는 매우 인간적이다
필요할 때 늘 곁에서 깜박거리는
친구보다도 낫다
애인보다도 낫다
말은 없어도 알아서 챙겨주는
그 앞에서 한없이 착해지고픈
이게 사랑이라면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 !
..............................................


 담배에 대하여


                                   최영미


그날 밤 첫사랑 은하수, 눈이 시리도록 매운
스무살의 서투른 연정, 아무래도 감출 수 없는
더 서투른 입술로, 떨리는 손으로
필락말락 망설이는
쉽게 태워지지 않는 뻑뻑한 고뇌로
이빨자욱 선명한 초조와 기대로
파름한 연기에 속아 대책없는 밤들을 보내고, 어언


내 입술은 순결을 잃은 지 오래
한 해 두 해 넘을 때마다 그것도 연륜이라고
이제는 기침도 않고 저절로 입에 붙는데
웬만한 일에는 웃지도 울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슬슬 비벼 끄는데
성냥곽 속에 갇힌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히 남은 세월을 차례로 꺾으면
여유가 훈장처럼 이마빡에 반짝일
그런 날도 있으련만, 그대여
육백원만큼 순하고 부드러워진 그대여
그날까지 내 속을 부지런히 태워주렴
어차피 답은 저기 저 조금 젖힌 창문 너머 있을 터
미처 불어 날리지 못한 기억에로 깊이 닿아
마침내 가물한 한줄기 연기로 쉴 때까지
그대여, 부지런히 이 몸을 없애주렴
......................................................

최영미 시인의 시에는
야릇한 자극이 있고, 얼큰한 추억이 있으며.
쌔근한 집착이 있고, 아련한 미련이 있다.
짜릿한 오르가즘과 가슴 콩닥거리게 하는 기다림이 있다.


담배 한 대가 생각나고
누군가와 섹스하고 싶다.

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언제였던가요?

최영미 시인의 감각적이고 예리한 자극에

욕망이, 열정이 꿈틀거리던 시절이...

그녀의 시 한 줄 한 줄을 다시 또 다시 읽어 내려가며

그녀의 혀끝에서 좌지우지되던 내 신경의 끄트머리...

그리곤 다시 오그라드는 내 허기...

그녀를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는 내 허망한 바램이

어쩌면 잠시나마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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