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al Computer
최영미
새로운 시간을 입력하세요
그는 점잖게 말한다
노련한 공화국처럼
품안의 계집처럼
그는 부드럽게 명령한다
준비가 됐으면 아무 키나 누르세요
그는 관대하기까지 하다
연습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메뉴로 돌아갈까요 ?
그는 물어볼 줄도 안다
잘못되었거나 없습니다
그는 항상 빠져나갈 키를 갖고 있다
능란한 외교관처럼 모든 걸 알고 있고
아무것도 모른다
이 파일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그는 정중히 거절한다
그렇게 그는 길들인다
자기 앞에 무릎 꿇은, 오른손 왼손
빨간 매니큐어 l4K 다이아 살찐 손
기름때 꾀죄죄 핏발선 소온,
솔솔 꺾어
길들인다
민감한 그는 가끔 바이러스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쿠데타를 꿈꾼다
돌아가십시오 ! 화면의 초기상태로
그대가 비롯된 곳, 그대의 뿌리. 그대의 고향으로
낚시터로 강단으로 공장으로
모오두 돌아가십시오
이 기록을 삭제해도 될까요 ?
친절하게도 그는 유감스런 과거를 지워준다
깨끗이, 없었던 듯, 없애준다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그대에게
어쨋든 그는 매우 인간적이다
필요할 때 늘 곁에서 깜박거리는
친구보다도 낫다
애인보다도 낫다
말은 없어도 알아서 챙겨주는
그 앞에서 한없이 착해지고픈
이게 사랑이라면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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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대하여
최영미
그날 밤 첫사랑 은하수, 눈이 시리도록 매운
스무살의 서투른 연정, 아무래도 감출 수 없는
더 서투른 입술로, 떨리는 손으로
필락말락 망설이는
쉽게 태워지지 않는 뻑뻑한 고뇌로
이빨자욱 선명한 초조와 기대로
파름한 연기에 속아 대책없는 밤들을 보내고, 어언
내 입술은 순결을 잃은 지 오래
한 해 두 해 넘을 때마다 그것도 연륜이라고
이제는 기침도 않고 저절로 입에 붙는데
웬만한 일에는 웃지도 울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슬슬 비벼 끄는데
성냥곽 속에 갇힌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히 남은 세월을 차례로 꺾으면
여유가 훈장처럼 이마빡에 반짝일
그런 날도 있으련만, 그대여
육백원만큼 순하고 부드러워진 그대여
그날까지 내 속을 부지런히 태워주렴
어차피 답은 저기 저 조금 젖힌 창문 너머 있을 터
미처 불어 날리지 못한 기억에로 깊이 닿아
마침내 가물한 한줄기 연기로 쉴 때까지
그대여, 부지런히 이 몸을 없애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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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의 시에는
야릇한 자극이 있고, 얼큰한 추억이 있으며.
쌔근한 집착이 있고, 아련한 미련이 있다.
짜릿한 오르가즘과 가슴 콩닥거리게 하는 기다림이 있다.
담배 한 대가 생각나고
누군가와 섹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