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선우


골목길 돌아 나오다 누가 나를 불러
잠시 눈길 준 폐타이어 쌓인 창고 앞
조붓한 담장 아래 아기 어금니처럼 돋아 있는
귤싹 하나 만난다 지난 겨울 어느 늦은 밤
소주를 사러 점방 가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낸
귤씨 하나가, 아니겠지 설마 그 귤씨 하나가


큰맘 먹고 사놓은 백개들이 귤 한상자
한겨울 밤 야금야금 까먹던 그 귤들이
더러는 맑은 오줌으로 몸 밖을 흘러나가고
사는 일이 서리 앉은 빨랫줄 같아,
푸념하면서도 하루를 견디게 한 어떤 열량이 되고
잔주름 생기기 시작한 눈가
지친 세포의 자살을 지연시키는 비타민이 되고
어두운 상자 속에 얼마 남지 않은 귤 몇알이
그래도 천연스럽게 댕글댕글 빛나던 힘!


귤껍질에 빼곡히 열린 구멍이란 게 실은
저의 중심을 향해 세상의 향기를 흐르게 한 통로는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몸을 맞대고
껍질을 벗겨내도 흩어지지 않던 귤조각
시고 달고 아린 저마다 다른 맛들이
열어둔 통로를 지나 중심으로 모이듯
귤 한상자 놓여 있던 겨울의 귀퉁이가 문득 밝아지고
알전구같이 흐릿한 창밖의 그늘이
외로운 귤알들로 빚어지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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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쑥스러운 웃음과 더불어
불쑥 내게 내밀던
오렌지빛 귤향수


그 고운 빛깔의 향수보다
그 달콤한 향보다
먼저 눈에 띈 건
사실...
누나의 낡은 손이었지.


한순간도 어긋남이 없이 찾아오는 계절이
40여년을 늘 어색하기만 했는데,


오늘 누나의 잔주름 가득한
세월의 눅은 때가 골골이 낀 손에
들려진 귤 향수 병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어찌나 시리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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