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목(裸木)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사는 게 원수라고,

왜 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도 있지만,
시원스레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몇 십년을 곱씹어도
잘 모르겠다고...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는 수백번을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라고...


오늘 저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오늘 저 사람들은 왜 죽어야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오늘 저 사람들을 왜 죽여야했는지도 따져 물어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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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올해도 어쩌면 내년도 힘들 것이다.

추운 겨울나기가 그렇고
우리의 하루살이가 그러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따뜻한 봄은 오고,
우리의 하루도 시작된다.


비록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또 한 고비를 넘고


아마도 내일은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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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대
                      정두리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의 자운영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 못한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스스로 다가오는 첫눈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늘 앞질러 사랑케 하실 힘 덜어내고
몇 배로 다시 고이는 힘
이파리도 되고 실팍한 줄기도 되고
아! 한목에 그대를 다 품을 수 있는 씨앗으로
남고 싶습니다
허물없이 맨발인 넉넉한 저녁입니다
뜨거운 목젖까지 알아내고도 코끝으로까지
발이 저린 우리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
이노리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나게 하는
눈물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대와 나는 두고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오는 길
그대와 나는 내리내리 사랑하는 일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

 

어릴적 이태원씨의 감미로운 노래 '그대'


" 그대 아름다운 얼굴에
  슬픈 미소 짓지 말아요
  그대 사랑하는 이마음 언제라도 있지요
  그대 아름다운 마음에
  슬픈 추억 갖지 말아요
  그대 좋아하는 이마음 언제라도 있지요 "


이 곡에 아나운서 서동숙 씨가 낭송한 시이다.
참 좋아했던 노래였는데, 요즘엔 자주 들을 수가 없다.
잊혀져서가 아니고 멀어져서...


사람도 그렇다.
자주 만날 수가 없다.
그 사람을 영영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멀어져서...


하지만 가끔씩이나마 그리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

작은 들꽃 34


                              조병화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이승의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사랑이로구나
가장 소중한 짐이 사랑이로구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지금 이곳, 이 자리까지
눈에 보이는 짐은 버리고 왔건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그런데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가장 쓸쓸한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서로 소리 나지 않게 주며 받으며
서로 멀리 이어 가는 가벼우면서도
가장 무거운 짐이란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소유가 아니란다
사랑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란다
사랑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다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것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영원히 갖고 싶어진단다
사랑은 혼자만이 갖고 싶어진단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야 한단다
사랑은 사랑받음으로써 행복해야 한단다.


아, 사랑은 사랑으로 행복해야 한단다.

........................................................

 

사랑은 사랑으로 행복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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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사과를 먹다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깔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별 생각없이 내뱉은 한마디의 말,
무심코 한 행동이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혹은 상처를 받는 일이 있습니다.

 

언젠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말로 다시는
연락할 수 없게 된 친구가 생각납니다.

 

친구들과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 친구는 그 농담을 단순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우리는 그걸 전혀 몰랐었고,
그래도 어릴적부터 친했던 친구라고
그래서 잘 안다고...
그냥 별 일 아니라고...

 

연락처도 바꾸고 연락도 않는 그 친구를
그 뒤로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만나면 소주 한 잔이라도 기울이며

'미안했다, 친구야'

하며 사과라도 해야할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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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 어

                               최을원


소양호,
빙판 구멍에 긴 촉수 내리고 앉은 사람들
깊고 어두운 곳에서 올라온 기억이 눈부시게 파닥거린다
그 젊은 날, 소양호는 허공에 떠 있는 유리공이었다
유리공 너머에서, 계절이 휘어지고, 건조한 햇살도 휘어지고,
속이 훤히 비치는 풋사랑도 휘어졌었다
세상은 너무도 투명해서 공지천 똥물조차도
대학 노트만한 여인숙 방 하나 가릴 수 없었다
내 속에 심해어처럼 숨어 있던,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에게 건네던 말들이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파닥이고 있다
알몸의 기억 초고추장에 찍으면,
몇 개의 거리들, 포구들, 주점들이 혀끝을 찌르며 지나간다
삭풍이 광활한 마당을 쓸고 있다
유배된 날들이 계곡으로 쓸려가고 있다
裸木들이 등뼈 완강한 산을 오르고,
소양호는 여전히 산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유리공은 없다
내장마저 서럽게 내비치던 날들은 이젠 없다
겨울새 한 마리 계곡마다 끝없이 기웃거려도
유리공 속에 갇혀 은빛 비늘 반짝이던 시간들
그곳으로 결코 회귀할 수 없음을, 나도,
오래 전 나를 떠나간 사랑도,
서로의 비린내를 나누어 갖고
이 도시의 어두운 터미널을 빠져나간 그 모든 연인들도
그때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내 젊은 날의 고독과 아픔, 상실과 동정심이 고스란히 떠 있는 소양호,

그 곳에 가본지도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 지금 돌이켜보면 그 허무의 시간이 성찰의 틈을 주기도 했음을...

이제는 그런 여유도 갖지 못하고 있다.

세상 그 무엇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지나간 시간은 그저 추억의 한 장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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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엽서

 

                         이해인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해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

언제부턴가 제가 올린 글을 읽어주시고

함께 아름다운 시를 공유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줄의 글이, 한 줄의 시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즐거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2009년 새해에는 좋은 일 기쁜 일만

많이 생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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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

벌겋게 달구어진 숯불보다 뜨거운,

핏빛 산수유 열매보다 붉은

젊은 날의 내 아버지의 손길이

이 겨울 밤, 열로 상기한 내 볼에 닿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아, 아버지!

가슴 한 복판이 뜨겁게 시려옵니다.

 

한 때는 부정하고만 싶었던

내 혈관속에 흐르는 그의 피를 가슴으로 느끼며

다시 뜨겁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 아버지, 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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