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 (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했을까?

 

내 존재의 의미를,

눈(자연)의 고결함을,

우리 생의 은총을,

사랑의 섭리를...


가치있는 삶의 주제들을 나열하면

이 몇 가지 쯤이 될 것이다.

살다보면 중요한 순서야 그때 그때 정해지겠지만

지금 내가 어디쯤일지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디쯤'이 될 것이다.

 

참 알, 수, 없는 우리 삶이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 별 헤는 밤  (0) 2009.03.17
윤후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0) 2009.03.12
강은교...진눈깨비  (0) 2009.03.04
이상... 거울  (0) 2009.02.19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진눈깨비

 

                        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어쩌면 우리 생이 그렇지....


어두운 세상 천지를 떠돌고 또 떠돌고
언젠가는 앉을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이런 저런 얘기라도
속 시원히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멀리 아주 멀리 가고 나서야

허공에 대고 이런 저런 얘기 주워담는구나.
어제는 이맘때 눈이 펑펑 내렸는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고 날이 훤하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후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0) 2009.03.12
김남조... 설일(雪日)  (0) 2009.03.09
이상... 거울  (0) 2009.02.19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이정록...서시  (0) 2009.02.12

 거울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의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내 젊은 날의 한 모퉁이에서
난 천재 시인 '이상'에 푹 빠져있었다.


그의 한 줄의 노래는
내 아픔이 되었고
내 노래가 되었으며
내 이상이 되었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답답한 인간임을...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거울 속에 난 미소를 잃었나봐...
  이건 내가 아니야....
  이렇게 슬픈 얼굴은 내가 아니야...
  거울 속에 나......'


'거울 속에 나' 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기묘한 분위기의 얼터네이티브 곡이었는데
이 곡을 써놓고 어지간히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조... 설일(雪日)  (0) 2009.03.09
강은교...진눈깨비  (0) 2009.03.04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이정록...서시  (0) 2009.02.12
김왕노...한강둔치   (0) 2009.02.12

사십세


                                      맹문재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젊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실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

 불혹(不惑)이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
라고 사십세를 이야기 했다.

그래야 겠지...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너그럽게 넘겨야 하고,
가볍게 잊어야 하고, 쉽게 이해해야 겠지.

그래야 겠지...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은교...진눈깨비  (0) 2009.03.04
이상... 거울  (0) 2009.02.19
이정록...서시  (0) 2009.02.12
김왕노...한강둔치   (0) 2009.02.12
이은규... 바람의 지문   (0) 2009.02.05

서시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줄의 글이

더 가슴 깊이 박힐 때가 있다.

 

멋진 촌철살인의 시(詩)이다.

시란 이래야하는 것처럼,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좀 엉뚱하지만 누군가 이 시에 덧글을 달았다.

'내 몸은 흠집이 많다.

 너무 마을과 가깝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내 몸이 여전히 성해서 참 다행이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 거울  (0) 2009.02.19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김왕노...한강둔치   (0) 2009.02.12
이은규... 바람의 지문   (0) 2009.02.05
김광균...설야(雪夜)   (0) 2009.01.29

한강둔치


                              김왕노


그리운 이름이 있어 한강둔치에 나가 봐라
도강을 꿈꾸는 것들이 소리 없이 모여 시퍼렇게 우거져 있다
낡은 이름표 마저 잃어버린
쇠비름, 바랭이, 씀바귀, 민들레, 김씨, 이씨, 박씨로
때로는 무릎 반쯤 물에 잠긴 갈대로
그렇게 오래 동안 도강을 꿈꾸며 살고 있다
잠잠해지는 물 비늘 사이로 그리움을 투망질해 올리며
저들 도강의 꿈 더 무성해지고 있다
한해살이풀로 또는 여러해살이풀로 신발이 벗기도록 발 돋음해
강 건너로 바람에 실어 보낸 씨앗들
어느 하나 무사히 닿았다는 기별도 없이 결국은 강물에 휩쓸려 가

버린 날들
도강은 물위를 걷는 기적 뒤에 오는 법인가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에 너무 어수선한 세상
강 건너 편을 바라보는 가슴엔
길어내고 길어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그리움
아직 저 강 건너 편에도
도강해오지 못한 등불이 밤마다 반짝이며 살고 있다
밤마다 불빛만 애타게 강물에 풀어놓으며 살고 있다
세월이 저렇게 거친 강물로 흐른다 해도
결코 접어버리지 않는 도강의 꿈이
밤이면 강물 속에 가만히 발 담가 보며 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강물은
몇 번 몸 더 뒤척이다 시퍼렇게 멍들어 흘러가는 것이다

.........................................................

무엇이 그리워 잠 못드는가?

무엇 때문에 저 강을 건너려는가?

 

강물은 흐르고, 그 강물처럼 세월도 흘렀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흘러가 기약조차 없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 저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것,

저 강을 바라보며 여기 서 있다는 것,

내 가슴속엔 아직 접어버리지 못한 꿈이 있다는 것.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이정록...서시  (0) 2009.02.12
이은규... 바람의 지문   (0) 2009.02.05
김광균...설야(雪夜)   (0) 2009.01.29
신경림... 가난한 사랑의 노래 / 나목 (두 편)  (0) 2009.01.22

 바람의 지문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초라함이란,
우리가 겨우 알 수 있는 것의 부족함이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다시 어디서 만나든
서로 반갑고 따뜻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록...서시  (0) 2009.02.12
김왕노...한강둔치   (0) 2009.02.12
김광균...설야(雪夜)   (0) 2009.01.29
신경림... 가난한 사랑의 노래 / 나목 (두 편)  (0) 2009.01.22
김사인... 지상의 방 한칸  (0) 2009.01.19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워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香氣)도 없이
호올로 차디 찬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차곡차곡 눈이 내려 쌓인다.

이리저리 흩날리던 눈송이가 창가에 내려앉는다.

소복소복 쌓이는 추억, 그리고 그리움

눈 내리는 밤,

한 편의 시로 달랠 수 있을까?

 

김광균의 설야는

눈 내리는 밤의 서경, 서정을 표현한 최고의 시이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왕노...한강둔치   (0) 2009.02.12
이은규... 바람의 지문   (0) 2009.02.05
신경림... 가난한 사랑의 노래 / 나목 (두 편)  (0) 2009.01.22
김사인... 지상의 방 한칸  (0) 2009.01.19
정두리... 그대  (0) 2009.0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