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 (入冬)

 

                           이성선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가을 편지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가로수 은행잎이 한 번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길바닥은 무척 화려해졌습니다.

온통 노란 황금빛 낙엽길을 걷는 것도

운치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과 같이 그 길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매끈한 은행잎 하나 주워서

호호 불어서는 주머니에 담았습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언젠가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했지.
대학로 한 커피숍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곳에서...

 

눈 내리는 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겠다.
아니, 어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부터 해야겠다.

하지만 오늘도 마음만 서둔다...

기차는 간다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아주 가끔 꿈 속에 정사를 나눈다.

너와

예전처럼...

숨막힐 듯 뜨거운 햇살이 내리는

철길 저 끝에

아지랑이...

아득히 멀어진다.

 

왼쪽 뒤통수에서 터질 듯 뛰던

심장 박동소리가 서서히 잦아든다.

목줄기를 타고 끈적이는 것을 꿀꺽 삼킨다.

목덜미, 등줄기로 주루룩

덜 식은 땀이 흐른다.

 

더듬 더듬 담배를 찾는다.

떨리는 입술로 메마른 것을 문다.

아직 숨이 거칠다.

 

그리움은

이젠 가고 없다.

떠나간 기차의 흔적도 연기도 없다.

고요하고,

공허하다.

지나가고 지나가는 2

 

                                                                                                                      정끝별


미끌하며 내 다섯 살 키를 삼켰던 빨래 툼벙의 틱, 톡, 텍, 톡, 방망이 소리가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수챗구멍으로 지나간다 그 소리에 세수를 하고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은 후 틱, 톡, 텍, 톡,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장터 길과 무악재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지나간다 꾹 다문 입술 밖에서 서성이던 네 입술의 뭉클함도 삼일 밤 삼일 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던 배반의 고통도 끝장내고 말거야 내뱉던 악살의 순간도 지나간다 너의 첫 태동처럼 틱, 톡, 텍, 톡, 내 심장 한가운데를 지나 목덜미를 지나 손끝을 지나간다 지나가니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울고 입을 맞추고 쌀을 사고 종이와 볼펜을 사고 모자를 사고 집을 산다 한밤중이면 더욱 크게 들려오는 틱, 톡, 텍, 톡, 소리를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틱, 톡, 텍, 톡, 날카로운 구두 뒤축으로 나를 밟고 지나가는 그 소리보다 더 크게 틱, 톡, 텍, 톡, 기침을 하고 틱, 톡, 텍, 톡, 노래를 하고 틱, 톡, 텍, 톡, 싸운다 틱, 톡, 텍, 톡, 소리가 들리는 한 틱, 톡, 텍, 톡, 나는, 지나가는 것이고 틱, 톡, 텍, 톡, 살아 있는 것이다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밀 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벌거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신세대 시인의 대표주자 격인 정끝별의 시 입니다.
그런데 그이도 40대 중반이 훌쩍 넘었다는 걸, 오늘 새삼 알고는 깜짝 놀랍니다.
제스스로 주워먹은 나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그녀의 글은 소탈하고 담백하면서도 어딘가 서늘하고 스산합니다.
한겨울 벌거벗고 신경줄까지 드러낸채 길가에선 서릿한 자작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항상 어딘가 기댈 곳이 있음을, 항상 지켜보아주는 그 무엇이 있음을 믿고 있는 듯 보이는군요.
그것이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돈이든, 명예이든, 혹은 그냥 희망이나 믿음이든 아무 상관없겠지요. 그냥 다행인 것을요...^^...
사람 사는 삶이 무에 그리 다르겠습니까. 무사하니 다행인 것이지요...
바다가 잠잠해서...

  레미콘 트럭

                                               이동호


아버지는 신이셨다 트럭에 지구를 올려놓고 자주 출타 중이셨다.
지구는 짐칸에서 저 홀로 빙빙 돌아가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저녁 무렵에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작업복은 은하수에 젖어 반짝이고,
뉴스에서 열대야가 자주 거론될 때에는, 북극의 빙하를 까만 비닐 봉지에 가득 담아오기도 하셨다.
얼음과자를 먹고 있는 우리 머리를 아버지의 손바닥이 쓰다듬을 때마다
후드득 우리의 발등으로 별들이 떨어지곤 했다.


우리는 자갈이거나 모래였다. 아버지는 몇 포대의 시멘트와 물만으로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셨다.
형은 한 가정의 든든한 바닥이 되었고, 나는 한 가정의 단단한 기둥이 되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지구를 물려주시고 산 속으로 돌아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마음에 신전을 세웠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다스렸다.


두어 개의 쇠못과, 나사못 같은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하곤 할 때에는,
가끔, 손바닥으로 다 큰 우리 등을 쾅쾅 두드려주신 것처럼 하늘에는 천둥이 치고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우리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를 구부렸다 펴곤 했다.


아이들도 이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그런 날에는 일찍 퇴근하여 나는 내 자식들에게 신화에 대해 말해주곤 했다.
태초에 아버지의 트럭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멘트로 이 세상을 지으셨다.
그 속에서 우리들을 살게 하셨다.


세상 밖에는 아버지의 트럭이 정차해있고, 지구는 그 트럭 위에서
빙빙 돌고 있다.

.........................................................


오늘도 일상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올랐다.
자정무렵, 나는 집을 향해가고 있다.


무거운 머리를 벽에 기대고 천장을 바라 본다.
나는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집을 나서서
지하철 한 구석자리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주변의 저들이 그러하듯이.


이런 우리의 일상이 즐겁고 유쾌하며
활기 넘치고 희망적이기를 기도해 본다.


우리의 삶은 그러하다.
아버지, 당신의 삶이 그러했듯이.

  풀 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제비꽃 1 
  
           나태주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아
쓸쓸한 날
제비꽃이 피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예쁘게
피었습니다.

.........................................................


진정한 아름다움의 비밀이 여기 있다.

아름다움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있다.

 

바라보는 것!

 

진실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혼자 외롭지 않게 마주 보는 것

  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

 
  들 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가을 노래가,

들국화의 노래 두 편이 너무나 극적이다.


가을의 절대고독을, 그 고단한 갈망을

가을 한녘의 기다림을, 그 막막한 설렘을

몸과 마음으로 갈무리해내는 방식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누군가가 그리우면 아니, 그냥 그 무엇이 그리우면

너무나 몹시 그리워 가슴이 부서질 듯 시리면

나는 과연 둘 중 어떤 모양새로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 나는 도대체 어느 한 구석 시리기나 한 건지...


그래도 가을이 무척 많이 깊어졌다.

이 가을에

 

                                   이수인

 

이 가을에

그리운 얼굴 하나 없는 사람은 슬프다

 

가을이 오면

오랜 기다림 속에

피어난 해바라기처럼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가을이 깊어

발 밑에 뒹구는 낙엽 속에서

보고 싶은 얼굴이 하나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등불 하나

밝히고 사는 사람이다

 

이 가을에

간절한 바람처럼

보고 싶은 얼굴 하나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스산함 저 뒤편에

따스한 마음의 등불 하나 밝힌다

...........................................


가을엔

 

                        이수인

 

가을엔

사람하나 보내도 좋다

눈 감고 있어도 피부로 느끼는 스산한 가을 앞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

 

낙엽이 떨어질 때

가슴에 묻어둔 사랑도 함께 보내라

마음에 담아둔 미움도 털어 버려라

낙엽이 쌓이는 초라한  길모퉁이에

가난한 연인들의 발밑에 밟히며

행복한 웃음을 듣고

이별한 연인들의 슬픈 사연도

들어주는 한 줌 낙엽이 되라

 

가을엔

사람하나 맞이해도 좋으리

가고 난 빈자리에

덩그라니 남아있는 텅 빈 의자

아름다운 저녁노을 바라보며

홀로 기도하는 여인보다

마주 보는 연인들의 눈길이

가을엔 한결 아름다우니

................................................

가을이 깊어가는 것은
 
점점 푸르러지는 하늘의 깊이로

낙엽이 구르는 소리로

가을비의 시린 감촉으로

비어가는 나뭇가지의 헐벗음으로

그리고 가슴 한 구석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발효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가을에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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