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自轉) 1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 소리를 걸어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자전(自轉) 2


밤마다 새로운 바다로 나간다.
바람과 햇빛의
싸움을 겨우 끝내고
항구 밖에 매어놓은 배 위에는
생각에 잠겨
비스듬히 웃고 있는 지구
누가 낯익은 곡조의
기타를 튕긴다.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자궁 속에서 회전한다.
밤새도록 맨발로 달려가는
그 소리의 무서움을 들었느냐.
눈치채지 않게 뒷길로 사라지며
나는 늘
떠나간 뜰의 낙화(落花)가 되고
울타리 밖에는 낮게 낮게
바람과 이야기하는 사내들


어디서 닫혔던 문이 열리고
못보던 아이 하나가
길가에 흐린 얼굴로 서 있다.

 

자전(自轉) 3 
 

문을 열면 모든 길이 일어선다
새벽에 높이 쌓인 집들은 흔들리고
문득 달려나와 빈 가지에 걸리는
수세기 낡은 햇빛들
사람들은 굴뚝마다 연기를 갈아 꽂는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고
늦게 깬 바람이 서둘고 있구나
작은 새들은
신경의 담너머 기웃거리거나
마을의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핏줄 속에는 어제 마신 비
출렁이는 살의
흐린 신발소리
풀잎이 제가 입은 옷을 전부 벗어
맑은 하늘을 향해 던진다.


문을 열면 모든 길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시야
허공에 투신하는 외로운 연기들
길은 일어서서 진종일 나부끼고
꽃밭을 나온 사과 몇 알이
폐허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자전(自轉) 4


골목 끝에서 헤어지는 하늘을
하늘의 뒷모습을
나부끼는 구름 저쪽
사라지는 당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불의(不意)의 비가 내리고
마을에 헛되이 헛되이 내리고


등뒤에는 때 아니게
강물로 거슬러오는 바다
동양식의 흰 바다
싸우고 난 이의
고단한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고
너의 발 아래서 아, 다만 펄럭이고


돌아가는 사람은
돌아가게 내버려두라
헤매는 마을의 저 불빛도
깊은 밤 부끄러운 내 기침 소리도
용서하라 다시 용서하라


바람은 가벼이 살 속을 달려가고
일생의 가벼움으로 달려가고
뜰에는 아직
멈추지 않는 하늘의
하루뿐인 짧은 내 뒷모습
반짝이는 반짝이는 잠을

진눈깨비

 

                        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어쩌면 우리 생이 그렇지....


어두운 세상 천지를 떠돌고 또 떠돌고
언젠가는 앉을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이런 저런 얘기라도
속 시원히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멀리 아주 멀리 가고 나서야

허공에 대고 이런 저런 얘기 주워담는구나.
어제는 이맘때 눈이 펑펑 내렸는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고 날이 훤하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후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0) 2009.03.12
김남조... 설일(雪日)  (0) 2009.03.09
이상... 거울  (0) 2009.02.19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이정록...서시  (0) 2009.02.12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거야.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떠나야 해.
천천히 한 걸음씩.


그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들여다 보아야겠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해.


흩어진 구름 위로 새파란 하늘이 보여.
어쩌면 그게 사랑이야.


내 볼을 스치는 바람에 시원하게 웃음이 나.
어쩌면 그게 사랑이야.


길가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가,
네가 보낸 한 줄의 메세지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해.


어쩌면 그게 사랑이야.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희덕... 귀뚜라미  (0) 2008.10.06
황지우...늙어가는 아내에게  (0) 2008.09.29
용혜원...가을을 파는 꽃집  (0) 2008.09.25
박인환...목마와 숙녀  (0) 2008.09.22
서정주...푸르른 날  (0) 2008.09.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