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 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을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트린다
...................................................................

꽁꽁 얼어붙은 얼음장 바닥에
시린 가슴을 묻어두고
가느란 흰 뼈를 깎아 다듬고
종잇장 같은 살을 에워 감쌌다.


겨울 바람의 칼춤은
시퍼런 서릿발 날을 세우고
투명한 눈물 꽃을
가지마다 뿌린다.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을 기다리는 일은
겨울 바람이 매서울수록 간절하다.


분명,
봄은 다시 오고
서슬 퍼렇던 서릿발은 흔적없이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고,
가지마다 새 움이 트는 그 상처 위에서
눈물은 자취도 없이 마를 것이다.

'명시 감상 5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종길... 상가(喪家)   (0) 2013.03.12
천상병... 새  (0) 2013.03.08
이형기... 호수  (0) 2013.02.26
오세영... 눈  (0) 2013.02.18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0) 2013.02.18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고재종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날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

 

그리움이 강물이 되고, 외로움이 산이 되는

그런 심상이 시상이 되고 또 노래가 되어 한 줄의 시가 된다.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그 장면에 내 마음을 실어 다시 그림을 그려낸다.

어떤이는 몸으로, 어떤이는 목소리로 또 어떤이는 손으로 표현해 내는데

그 표현을 많은 이들과 공감하는 일이 또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창작활동의 고통'이 바로 여기부터 시작된다.

고재종 님의 시에선 묵은 장내음이 진동한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만...작은 연가  (0) 2008.07.07
문정희...유리창을 닦으며  (0) 2008.07.07
강연호...감옥/ 윤수천... 아내...  (0) 2008.07.07
박성우... 삼학년  (0) 2008.07.02
김수영...풀  (0) 2008.07.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