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명시 중의 명시...

 

도회지에서의 어린 시절의
낡은 기억들은
뜨겁거나 혹은 아주 차갑거나
답답하거나 또는 칙칙한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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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불꽃,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

동네에서 말썽쟁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땜통 억만이는

곤지암 계곡에서 물을 많이 마시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중동에 밤 일을 나가야만 했던 수남 엄마는

만취해서 돌아온 어느 새벽녘

연탄가스를 잔뜩 마시고 누워있던

수남이를 영영 깨우지 못했다.

왼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있던 호룡이 삼촌은

늘 호룡이를 때렸다.

비바람이 무척 불어 닥치던 어느 날

마당 한 가득 피가 흥건했던 그 날,

이후로 호룡이도 호룡이 삼촌도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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