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가리왕산에 기도 다녀오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쉴 틈이 없다.
이제 자식들이 모두 중년이 됐건만, 여전히 물가에 나앉은 토끼 새끼같은 자식들...

그들을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하셨을테니, 당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뿌듯함이 그리고 자부심이 묻어난다.
한참만에 얘기 보따리를 다 풀어놓고서야 스스로도 매우 만족스러우신지 목소리에 한껏 여유로움과 보람이 느껴진다.


당신이 자식을 잘 두긴 했다고......
주변 이웃들도 당신 속이 제일 편하지 않느냐고 부러워들 하신단다.


기가 막히게 맛있는 사과 한 박스와 이제껏 이처럼 빛깔 좋은 것을 본 적이 없는 고춧가루 한포대까지 추석에 다 들고 오시겠단다.
어느새 고희가 가까운 노인네가 다 된 어머니의 때아닌 힘자랑과 자식자랑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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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우리들의 간난한 삶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
그의 글엔 쓸쓸함과 고통스러움, 절망과 좌절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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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바람의 집 - 겨울 판화(版畵) 1

                                                                 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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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기형도


아이는 살았을 때 한 가지 꿈이 있었다.
아무도 그 꿈을 몰랐다.


죽을 때 그는 뜬 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이 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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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그리 넉넉치 않은 집 방안,
겨울 외풍에 코끝이 시리고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온 발끝이 시리고
머리맡에 놓인 요강의 오줌도 얼고,
널어놓은 내복 빨래 소매단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던 때가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안개처럼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면
진눈깨비 흩뿌리는 날이면


요절한 시인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그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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