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삶도 죽음도 자연의 한조각일뿐인 것...

만남도 그리고 헤어짐도 그저

집어들었다 놓은 조약돌 같은 것...

흐르는 시간도, 흘러간 옛 이야기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마냥 흘러가버려서 매양 잊혀지는 것...

잠시도 서서 쉴 곳 없는 삶의 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저 모퉁이를 돌면 멈춰질까 싶어

또 걷다보면 이어지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명시 감상 2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양희... 못  (0) 2009.06.10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0) 2009.06.05
김용택... 봄비1, 2 (두 편)  (0) 2009.05.21
최영미... 마지막 섹스의 추억  (0) 2009.05.15
이외수... 비는 소리없이 내린다   (0) 2009.05.11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유리창과 마음


                              김기림

 

여보 -
내마음은 유린가봐. 겨울 하늘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체 하더니
하로밤 찬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어간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마음은 유린가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

 

감각적인, 너무나 감각적인 시어(詩語),
예민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 생동감 넘치는 상징과 비유.

행간을 읽어내려갈 때마다 쨍하고 금이 갈 듯하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작가로 이효석, 조용만 등과 함께
구인회를 창설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이기도 했던
김기림의 시 두 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