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김명은


어떤 기다림이 지쳐 무료가 되는지,
가끔씩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
지나가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깜박이는 신호등 네 길거리지만
나는 너의 행간이 아니라서
비켜섰다가 돌아오는 길,
겨우내 키를 움츠려 넘보지 못했던
엄동의 담장 저쪽, 못 지킨 약속 하나 있어
끝끝내 봄 밀려오는지,
까치발로 그 추위 다 받들어
가장 높은 가지 끝으로 목련 한 송이 피어난다.
다시 며칠 사이에도 내내 할 일이 없어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면
건답 위 봄 파종같이 뿌려진 인파들,
무더기 밀린 약속 한꺼번에 치러내려는 듯
만개의 목련 길바닥까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세상은 참 바쁘다, 어느 사이 나는
얼음의 문신 홀로 몸 속에 새겨넣었는지.
해동이 안 되는 기다림과 권태 속으로
느릿느릿 시건이 가 닿는 저 건너 공터 어디쯤
겨우내 짓고 있었던 마음의 폐허,
그 얼음집 다 세우기도 전에
어느개 끈을 끊고 개가 사라져버린 골목 입구를
혼자서, 혼자서 우두커니 지켜본다.
......................................................................

시인은 두 눈으로 참 많은 것을 본다.
몸 하나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한 순간,
이미
스무 줄을 훌쩍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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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날


                       신경림


새벽 안개에 떠밀려 봄바람에 취해서
갈 곳도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내리니 이곳은 소읍, 짙은 복사꽃 내음.
언제 한 번 살았던 곳일까,
눈에 익은 골목, 소음들도 낯설지 않고.
무엇이었을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낯익은 얼굴들은 내가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복사꽃 내음 짙은 이곳은 소읍,
먼 나라에서 온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휘청대다가
봄 햇살에 취해서 새싹 향기에 들떠서
다시 버스에 올라.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

제발 봄바람 났으면 좋겠더라.

올 봄에도 봄 꽃 구경도 변변히 못하고
세월만 그저 보냈다.


이제 봄 비 궂게 내릴테고

심술맞은 봄바람마저 닥치면
꽃잎은 다 떨어지고,
내 맘도 어디론가 흩어져
갈팡질팡 하다가
아른아른 멀어지고...

어른어른 늙어지고...

봄 날

 

                                 김남극

 

간장 냄새에 발이 푹 빠지는
장독대 뒤
꽤나무꽃 피었다.
살결이 쉽게 짓물러
미간을 스치는 바람에도 떨어져
막 잎 내미는 무잔대
잔 손 속으로 포갰다.
댓돌에 앉아
단지를 열고 고추장을 푸는 어머니
근육도 말라붙은 종아리를 보다가
청춘의 향기와 빛깔이 뒤란 가득 술렁이던 시절과
한순간 지는 꽃잎 따라
울컥 울음이 나던 시절을 생각하다가
집안에 들어와
오래된 횃댓보를 펼쳤다.
매화나무는 근육질인데
꽃은 엉성하고
그 위에
어슬픈 꾀꼬리 한 마리
가래 섞인 울음소리 들린다.
다시 결 따라 접어놓고
엉덩이가 시린 방바닥에 누웠다.

봄햇살은 마당가에서 낄낄거리며 자기들끼리 놀다가
슬레트 지붕 위로 올라간다 .
어둠이 문지방에 들었다.
꽤나무꽃 밤새 꿈 속에서
횃댓보 가지런히 결 따라 진다.
수(繡)마다 보풀 인다
마음을 건너 어머니에게로 가는
부풀이는 수(繡) 자국들

 

 

봄날 2

                                   김남극

 

햇살 깔깔대며 양철지붕을 구르는 봄날
할머니들 식은 밥덩이처럼 모여 앉아 감자 눈 딴다.
건네는 말소리에선 가끔
지난 겨울 강가 얼음이 천둥처럼 갈라지던 소리들
연일 내리던 눈발이 뒤란을 서성이던 소리들
솔가지 위 눈덩이 사소한 바람에 쏟아지듯
수화기에서 쏟아지던 자식들 물기 묻은 목소리들
비명 길게 끌며 골짜기 끝을 지나 산으로 치달리던
설해목 쓰러지는 소리들, 그렇게 마른 별처럼

진 노인네들 요령소리
이따금 황사 따라 감감하면서 가슴 막히게
두런두런

초승달 양철지붕에 내려 앉히는 소리 속에서
감자 씨눈 트는 소리
잔설 그림자 기웃거리는 개울물 소리 속에서
피라미 지느러미 터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끌고
또 소리를 끌고 ...

..........................................................................

 

인간내면의 풍경화 시인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김남극님의 시입니다.
따스하고 온화한 봄날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어느 한녘이 서늘하고 소슬함을,

우리의 삶 어느 한 녘이 언제나 그러함을,

어찌 이리 잘 그려낼 수 있을까요?

강원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을 보니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어느 숲길을

터벅터벅 걷던 내 뒷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봄 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 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

정말 눈 깜빡하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가는 구나...

5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 눈부신 아침,

모두 힘 내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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