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언젠가 수를 셀 때, 앞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른지 아니면 뒤에서부터 세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할지 헤어지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나와 이별하는 사람이 새롭게 만나는 사람보다 많아졌다는 걸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게 남은 날이 또 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내가 남기고 갈 것도, 가지고 갈 것도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지금의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하려면 많이 내려놓고, 비우고, 덜고 가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함께 가자고 마주 잡은 손을 언젠가는 놓아야 한다. 살다 보면 각자의 길을 갈 때가 온다.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친구, 선후배, 동료, 연인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명시 감상 5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윤... 묘비명  (0) 2014.01.15
이형기... 나무   (0) 2014.01.15
김현승... 눈물   (0) 2014.01.14
오탁번... 죽음에 관하여  (0) 2014.01.13
백석... 국수  (0) 2014.01.09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장미가 함박 피어있었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은 나를 채근하느라 힘을 다 뺐다.
무기력해진 내가 더 맥없어 보일 때 쯤,
화려한 장미의 향연이 펼쳐져 있음을 그제서야 보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향연도 끝날 때가 가까웠음을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탐스럽게 피었다 싶은 장미에 손을 대자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핏빛 꽃잎...


내 맘 속에 열정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가라앉혀야 할 때를 알게 된 것일게다.


다음을 위하여...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이해인...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0) 2011.07.07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