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 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

어느해 겨울,
차디 찬 술 한잔 목구멍에 털어넣고
눈물 반쯤 섞어
목이 잠기도록 밤이 새도록
이 시를 중얼거렸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휘청대며 걸었던
내 젊은 날 방황의 어지러운 발자취를,
그 쓰디 쓴 기억을 좇아본다.


아득히 멀어져 이제는 너무 희미해져버린
그 시간 속 어디에도 내 마음의 고향은 없었다.


그래, 사랑이란 무엇이겠나?

고요한 가을


                    이시영


가을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까이서 멀리서 나 부르는 소리
부르다가 다가서면 귀 세우고 더듬이째 잦아드는 소리


가을 속에는 누가 오고 있을까
산 넘고 물 건너 긴 다리를 뻗어
쓰러져서도 발소리 죽여 야밤을 타는 소리
새벽을 딛는 소리


가을 속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풀섶에 스치는 타는 눈동자
등뒤에서도 갈참나무 뒤에서도 빛나는 눈동자
가을 속에는 누가 누가 숨어 오고 있을까

......................................................................

낙엽...
사사락 낙엽 구르는 소리

찬바람...

옷깃을 여미며 손등에 닿는 냉기

새벽 어스름...

어둠에 기대선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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