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

전적으로 누구의 편이 되는 것...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평생토록 내 편이 되어주면 좋겠다.
나 역시 네 편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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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린 뒤


                         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퉁퉁 불은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


시름없이 시들어가는 시간
나는 또다시
절망에 끝에 맞닿았다


혼미하게 뒤섞이는 이름들
자꾸만 멀어지는 얼굴들
그 속에서 색 바랜 나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양철지붕 아래 요란한 빗소리
닳고 닳은 고막을 찢어낸다
언제나 내 속엔
나를 야단치고 때론 나를 어르는 누군가가
양철지붕의 집을 짓고 산다.


 - 목탁 - 양철지붕 (전문)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자식노릇 한 삼십년 하고 나니,
부모노릇도 한 삽십년 하게 될 터이다.


이래저래 따지고 보면
제 노릇하고 산다는 게

참 만만치는 않다.


나는 누구에게 편안하고 든든한 의자인 적이 있었는지...
슬며시 몸무게를 실어 의자에 기대본다.


내 낡은 의자 등받이는 오늘도 영 미덥지가 못하다.

서시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줄의 글이

더 가슴 깊이 박힐 때가 있다.

 

멋진 촌철살인의 시(詩)이다.

시란 이래야하는 것처럼,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좀 엉뚱하지만 누군가 이 시에 덧글을 달았다.

'내 몸은 흠집이 많다.

 너무 마을과 가깝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내 몸이 여전히 성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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