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3.1.]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물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조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을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가지 계속 되길 바란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침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도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곤란을 벗어나려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푸진 않게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의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자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사람을 사랑 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하룻밤


                                     문정희


하룻밤을 산정호수에서 자기로  했다
고등학교 동창들 30년만에 만나
호변을 걷고 별도 바라보았다
시간이 할퀸 자국을 공평하게 나눠 가졌으니
화장으로 가릴 필요도 없이
모두들 기억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우리는 다시 수학여행 온 계집애들
잔잔하지만 미궁을 감춘 호수의 밤은 깊어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냥 깔깔거렸다
그 중에 어쩌다 실명을 한 친구 하나가
"이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년"이라며
계속 유머를 터뜨렸지만
앞이 안 보이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아니, 앞이 훤히 보여 허우적이며
딸과 사위 자랑을 조금 해보기도 했다
밤이 깊도록
허리가 휘도록 웃다가
몰래 눈물을 닦다가
친구들은 하나둘 잠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아기들, 이 착한 계집애들아
벌써 할머니들아
나는 검은 출석부를 들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벼이 또 30년이 흐른 후
이 산정호수에 와서 함께 잘 사람 손들어봐라
하루가 고단했는지 아무도 손을 드는 친구가 없었다

................................................................

 

그냥 친구니까 좋다.

딱히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한 때의 시간을 공유했던 것으로

수 십년을 흘려보낸 후에도

그 시절 기억을 함께 비벼먹을 수 있고,

그저 친구였다는 이유 하나로

네 주름살이며, 네 허물도 그냥 봐줄 수 있다.

고단한 삶 속에 잠시나마

어디 한 켠 기댈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갈 때 가더라도 말이다.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길 갈 수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참으로 든든한 일이겠지요... 마음이 텅 비어 울적하고, 혼자라고 느낄 때,

누군가 늘 내 곁에 있다고 말해주고 다독여 주는 이가 있다면 말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런 벗일까 찾기 전에 ... 먼저 ...

난 누구의 이러한 벗일까를 한 번 생각해 봐야겠네요....

 

'접시꽃 당신' 으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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