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천 (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갈 대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몇 해전

모 문학회 시상식자리에서

목순옥 여사님을 뵙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시냐고... 나도 목가라고...

그러자 손을 꼭 잡으시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왜 목가냐고...'

나도 그 말에 목에 멨다...

소풍이 아름다웠다고만 말하기엔

아직은 너무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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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신용선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사랑인 것을


그대를 잊기 위하여
살갗에 풀물이 밴 야영의 생애를
이끌고
바닥에 푸른 물이 고인 아득히 오래된
마을,
그대의 귀엣말보다 더 낮은 소리의 세상으로
내려가기도 했었네.


제 울음 다 울고 다른 울음 바라보는
아무 그리움도 더는 없는
키 큰 갈대가 되어
귀 기울여 바람소리 아득히 들리는
먼 강변에
홀로
서 있기도 했었네.

.......................................


억새

                          신용선


간결해지기 위해
뼈에 가깝도록 몸을 말리는
억새처럼


저절로 알아먹었던 유년의
말 몇 마디만 남기고
다 버리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갈기가 되어
달리다가 일어나고


달빛이 들면 있지도 않은 이별을 지어
손을 흔드는
억새처럼


속없이 살고 싶습니다.
눈물로도 와해되지 않는
세상의 일들 잊고

.........................................................................

말과 소리, 글과 눈, 가슴과 눈물, 그리고 바람...

스러져 누울 때까지 홀로 서 있어야 한다는 인간의 숙명을

그 누구인들 벗어날 수 있을까마는

가벼이 보내려 애 씀을 '삶'이라 할 밖에...

생전에 단 한번 마주치지 못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그의 발자취를,

그의 흥얼거림을 고스란히 뒤따라 가며 듣고 있다.

이 가을... 저 강변 어딘가에서, 저 산모퉁이를 돌면

다시 그의 노래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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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오랜만에 편지를 쓰려니,

하고 싶은 말 너무 많은데

차마 다 잇지 못하고,

결국 할 말 조차 모두 잊고는

또 접게 된다...

그리움을 적어 보내기에는

아직 내 마음이 너무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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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뚜라미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는,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다면

나 아직 여기 살아있음을...


그 고귀한 작은 진리 하나 찾지 못하고,

내 울음은

누구의 마음을 텅 비게 하고

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누구의 마음을 닫게 하고...


내 울음이 노래가 되고,
언젠가 누군가의 가슴에 울릴 수 있을까?
그것조차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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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농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이 사랑을 어떻게 우리의 얄팍한 입으로 더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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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거야.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떠나야 해.
천천히 한 걸음씩.


그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들여다 보아야겠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해.


흩어진 구름 위로 새파란 하늘이 보여.
어쩌면 그게 사랑이야.


내 볼을 스치는 바람에 시원하게 웃음이 나.
어쩌면 그게 사랑이야.


길가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가,
네가 보낸 한 줄의 메세지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해.


어쩌면 그게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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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파는 꽃집

 
                              용혜원

 

꽃집에서
가을을 팔고 있습니다.


가을 연인같은 갈대와
마른 나무가지
그리고 가을 꽃들
가을이 다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가을 바람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가슴으로 느껴보세요.
사람들 속에서도 불어 오니까요.


어느 사이에
그대 가슴에도 불고 있지 않나요.


가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가을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을을 파는 꽃집으로
다 찾아오세요.


가을을 팝니다.
원하는 만큼 팔고 있습니다.


고독은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


가을비가 내린 후로 피부로 느껴질만큼 바람이 차갑다.
이 서늘함이 서걱서걱 부서질 즈음이면
이 가을을 아쉬워하게 되겠지.


늘 지나쳐 가고 나면 알게되는 시간,
그리고 사랑, 사람들...


갈대도, 마른 나무가지도, 꽃들도
고독과 더불어 사는 법에 익숙하기도 하지.


몇 십년을 살았건만 아직도
알 수 없는 나, 그리고 사랑,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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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서른 한 살...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전에 목마를 타고 저 하늘로 떠나버린 시인이 그립습니다...

그의 짧기만한 삶 역시 그리움으로 점철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움이... 개인의 사사로운 것이 되었든,

아니면 민족의 그 무엇이 되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바람처럼, 신기루처럼 스쳐지나가 잊혀져버리는 얼굴이 아니라면

남이 되기 싫어서라도

그리워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 봅니다...

 

어느 가을 한녘,
천재 시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아쉽고...
그의 노래 소리가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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