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여름 아침


                                        김광섭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

한여름 못가의 풍경이 그려지는 시이다...

마침 너무 잘 어울리는 사진이 있어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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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임길택

 

마루 끝에 서서
한 손 기둥을 잡고
떨어지는 처마 물에
손을 내밀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처마 물이 떨어질 때마다
톡 탁 톡 탁
손바닥에서 퍼져 나갔다.
 

물방울들 무게
온몸으로 전해졌다.
 

손바닥 안이
간지러웠다.

...................................................................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장맛비가
내일 닦을까 모레 닦을까 미뤄두던
유리창을 말끔히 씻어놓는다.
쏟아지는 장대비가 오히려 반가운 아침이다.

답답했던 기분도,
어지러웠던 마음도
깨끗히 씻겨내리는 기분


무게를 던 구름
가벼워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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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에게

 

                  서정윤


어디에서 피어
언제 지든지
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 살면서 맺는
숱한 인연의 매듭들을
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
들꽃처럼 소리 소문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
너와 나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
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냥 피었다 지면
그만일 들꽃이지만
홀씨를 날릴 강한 바람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

10여년만에 어찌어찌 연락이 닿아 친구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30분이나 먼저 도착한 자리,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나타난 친구는
파뿌리같이 푸스럭거리고 성긴 머리에
마른 푸성귀처럼 바싹 마른 몸을 하고
빈 논바닥 바람맞고 선 허수아비 마냥 흔들흔들 다가왔다.


안타까움 반, 반가움 반 더해져서 코끝이 찡해졌다.
손을 잡으며 왜 이렇게 말랐냐고, 어디 아팠냐고 물었다.
힘없이 고개를 젓는 친구.


저녁을 먹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에 대해 말문을 연 친구는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많이 덜어 감추고서야

조심스레 내게 들려주었다.


차마 그냥 보낼 수 없어
잡고 또 붙잡아 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후에야 서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참 오랜만에 웃었다고...


이제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
자주 연락하며 살자고 인사를 건냈다.
비 오는데 얼른 들어가라고 휘젓는 친구의 손등이 자꾸만 흐려진다.


어둠속으로 까마득히 멀어지는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불빛이 다 사라지고도 한참동안...


변덕스런 하늘...
후둑후둑 떨어지는 소나기를 고스란히 맞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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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綠陰)


               허영자


오직 이 순간만을
뜨겁게 숨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짧더라도 굵게.....


이십대 젊은날의
기고만장하던
그러나
더없이 순수하던
푸른 기염같이


타오르는
녹음(綠陰).

...........................................

타오르는 햇볕이 뜨겁다.
글자 그대로 맹하(猛夏)다.


조금 지나고 나니,
우리의 푸르름이 짧은 한때임을 안다.


그래서 꺾이지 않을 것같은 이 염천(炎天)도
고분고분히 견뎌낼 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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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첼로의 레퀴엠


                                         강미영


몸 안으로 팔도 구겨 넣고
다리도 쑤셔 넣는다
음악이 된다


케이스 안에 갇혀 있는 남자
몸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제 살 뜯어내며
케이스 안에 갇혀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다리 사이
세상으로 뛰쳐나간 귀들
달팽이 의자에 앉힌다
현의 여자
활의 여자
뼈를 깎고 사는 허리 잘룩한 자웅동체
불두덩 더듬거리며
날마다 수음하는
꿈을 꾼다


그 남자는 첼로
케이스 안 낡은 방에서
오늘도 음악 같은
수음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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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최옥


일년에 한 번은
실컷 울어버려야 했다
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했다
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야 했다


눅눅한 벽에서
혼자 삭아가던 못도
한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
생각에 젖고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우리는 모두
일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

비 오는 날

누군가가 그리운 것은

어지러이 빗금 간 창에

제 얼굴이 비치는 까닭이다.

 

비 오는 날

마음이 허전한 것은

가슴 어딘가에 감춰둔 못 구멍으로

바람 통하는 소리가 들리는 까닭이다.

 

비 오시는 날은

유리창을 닦고

빈 손, 빈 가슴 채울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셔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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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을 보며


                     김종목


냇가에서 조약돌을 본다.
둥글고 예쁜 하얀 조약돌,
물의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물무늬가 배도록 쓰다듬어 만든
저 둥글고 예쁜 조약돌.
끌이나 망치로는 만들 수 없는
부드러운 물의 손
부드러움이 만든 예쁜 돌,
툭툭 모가 난 성질의 돌들이
저렇게 부드러운 성품이 되었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십 년도 아니고
수천 수만 년을 견디면서 만든
저 한없는 참을성,
그리고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과 속삭임.
둥글고 예쁜 조약돌 위로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눈으로
부드러운 손길로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참고 따뜻하게 사랑했는지,
모난 돌들이 둥글게 되듯
오래 참고
오래 견디며 사랑했는지.

........................................................................

그저 모난 것을 망치로 두드리고

그저 모난 것을 끌로 깎으려 하진 않았는지

그리하여 깨뜨려 못쓰게 하진 않았는지 ‥‥

 

오늘도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의 손

아니, 내일도 모레도 부드럽게 쓰다듬을 물의 손

 

그 따스하고 정결한 손의 부드러움

그 온화한 속삭임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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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이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얹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오늘이 1944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옥중에서 돌아가신 날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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