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조병화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

살아있으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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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엇그제 아주 먼 길을 떠난 친구가 하나 있다.
그는 아주 성실했고, 패기 있었고, 가슴이 따뜻했다.


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수술을 했던 친구...
다음 주에 만나면 오랜만에 쏘주나 한 잔 하자며 환하게 웃던 그를

영정사진으로 다시 만났다.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분명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버지가 될 것이다.
곧 태어날 새 생명의 곁을 항상 지켜줄 것임을 믿는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간이역
                   신경림


배낭 하나 메고
협궤철도 간이역에 내리다
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
몸에 엉키는 갯비린내
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
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
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
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
대낮부터 사연이 길다
갈매기가 울고
뱃고동이 울고
긴 장화로 다리를 감은
뱃사람들은 때도 시도 없이 술이 취해
유행가 가락으로 울고
배낭 다시 들쳐메고 차에 오르면
폭 좁은 기차는 마차처럼 기우뚱대고
차창으로 개펄이 긴
서해바다 가을이 내다보인다
......................................................................

아직 휴가지를 정하지 못했다.
바다를 갈까, 산으로 갈까.
아이들과 집사람까지 모두 네식구가 떠나야하는 여행준비는
언제나 복잡하고 번거롭다.


문득 아무 때나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젊은 날을 추억해 본다.

그래, 이번엔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대로 가봐야겠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실행되기도 어렵겠지만

우리 가족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비 그친 새벽 산에서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槍)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내딛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가열찬 산행...

그리움도, 외로움도 생각할새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을 산길에 줄줄이 흘려버리고 돌아왔다.

다시는 산을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벽 산의 기운을 호흡했던 것이 언제였던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오늘 문득, 다시 새벽 산을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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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정호승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 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 속 깊이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 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별들이 쉬어가는 숲이 되기를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나는 왜 당신의 의자 한 번 고쳐주지 못하고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

낡은 의자의 기도


의자로 태어나 살 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잘 갖춘 모양새로 사랑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잠시 쉬어갈 곳이 됨을 감사합니다.
온전히 한 자리 지켜내게 함을 감사합니다.
그들을 무릎을 굽혀 똑바로 앉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마주 하기 무섭게 등 돌리고 돌아앉은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심에 감사합니다.
발 뻗고 기대앉은 자들의 무례함을 받아주심을 또한 감사합니다.
가끔 나를 밀치고 넘어뜨려도 모두 잘 인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비록 낡고 부서져 더 이상 쓸모없어지더라도
아무런 후회 남지 않음을 또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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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자식노릇 한 삼십년 하고 나니,
부모노릇도 한 삽십년 하게 될 터이다.


이래저래 따지고 보면
제 노릇하고 산다는 게

참 만만치는 않다.


나는 누구에게 편안하고 든든한 의자인 적이 있었는지...
슬며시 몸무게를 실어 의자에 기대본다.


내 낡은 의자 등받이는 오늘도 영 미덥지가 못하다.

해인사(海印寺)


                        조병화


큰 절에 사나
작은 절에 사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사람은 하나
...................................................................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그 자체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원본이면서 말 그대로 유일본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들은 작든 크든, 천하든 귀하든 간에 생명이라는 점에서

서로 평등하며, 평등해야 마땅한 것이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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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강정식


줄무늬가 선명한 푸른 수박
칼을 대기가 무섭게 ‘쩍’ 갈라져
이내 붉은 속살을 드러낸다
아내는 호기 있게
‘푹푹’ 숟갈로 퍼내어 화채를 만들고
아이들 달려들어
대중없이 파먹는다. 금세
큰 박 두 쪽에는, 가장자리에 
붉은 속살 듬성듬성
거칠게 일어서고
검은 씨 몇 개, 끈적이는 붉은 과즙
탁자 위에 흥건하다
내 속처럼 갈라져 파헤쳐진 박
아직도 냉기가 남아서
등줄기에 흐르던 땀
선득하게 잦아들고
창밖에 높이 걸린 새털구름
수박 물이 흠뻑 들었다
............................................................

 

아직 한 여름 낮의 열기가 식지 않은 초저녁,

어른 머리통보다 큰 수박 한 덩이 사서 들고

그냥 올라가기도 만만치 않은 경사진 길을

땀 뻘뻘 흘리며 허위허위 올라간다.

 

수박 한 덩이도 못 들고 가겠냐고 선뜻 나섰던

내 호기가 후회로 바뀔 즈음,

전화기 너머로

한껏 높아진 아이들 목소리가

벌겋게 단 내 귓전에

수박 씨마냥 콕콕 박힌다.

언제 와, 빨리 와

 

빨리 보고 싶은 게

수박인지 나인지는 알 게 뭐냐

그래 금방 간다.

수박 한 덩이 가뿐히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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