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첼로의 레퀴엠


                             강미영


몸 안으로 팔도 구겨 넣고
다리도 쑤셔 넣는다
음악이 된다


케이스 안에 갇혀 있는 남자
몸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제 살 뜯어내며
케이스 안에 갇혀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다리 사이
세상으로 뛰쳐나간 귀들
달팽이 의자에 앉힌다
현의 여자
활의 여자
뼈를 깎고 사는 허리 잘룩한 자웅동체
불두덩 더듬거리며
날마다 수음하는
꿈을 꾼다


그 남자는 첼로
케이스 안 낡은 방에서
오늘도 음악 같은
수음을 한다
..................................................

내 감각의 발정을 달래기위해 행해왔던
수음의 횟수가 늘어가고
말초신경이 무뎌져 가면서
더 이상 발기되지 않는 내 몸...


탄력없어진 피부에 묵은 때처럼 쌓여가는
편견, 고정관념 그리고 독선...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이제는 감각적인 것에서 풀려나는 것.
감정의 묵은 때, 관념의 껍질을 계속 벗겨내야 하는 것.
더 이상 늙어가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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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면


                          이근우


가을엔
찻잔 속에 향기가 녹아들어
그윽한 향기를
같이 느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가을엔
가슴을 터놓고 쌓인 얘기를
서로 부담없이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가 그립습니다.


가을엔
밫바랜 추억도 더듬어 보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받쳐들고
빗소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가을엔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고
찬바람 불면 낙엽지는 소리에
더욱 공허한 마음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

어쩌면 저 하늘은 저리도 빨리
파란색으로 가을 옷을 갈아입는지...


어쩌면 저 황금 벌판은 저리도 빨리
누런 황금색 물이 드는지...


어쩌면 저 가녀린 억새는
허옇게 세버린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서글프게 섰는지...


수 십년을 마주치는 가을 바람이건만
오늘은 왜 자꾸만 가슴이 시려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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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열 몇 살의 어린 소년에게 그의 시는
한 단어, 한 단어, 한 줄 한 줄이 모두 감동이었다.

그의 노래에 취해 난 반드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후로 스물 몇 해가 더 지났다.


그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소년은 세상을
젊은 시절 요절한 시인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으며,
그의 노래를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어느 흐린 가을 날,
한 천재 시인의 글을 다시 읽는다.
다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종이비행기

 

                       이선명


종이를 접어 날리는 습관이 생겼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종이 접어
그대도 바라보고 있을 저 하늘에
그대를 꿈꾸며 나를 보낸다


그대의 마음 가에 닿지 못하고
금세 내 그리움 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기운 사랑만을 쫓아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 눈물
저 나약한 비행기가 그녀에게 갈 수 없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사랑이란 포기 할 수 없는 절망
오늘도 나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종이 접어 그대에게 날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오직 이것뿐
깊어 가는 마음만 하늘을 날아간다

......................................................................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어느 가을녘 하늘,
그 푸르름이 끝없이 넓고 깊어
투명에 가깝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하늘
그 어디에도 날아가는 것들의 자취조차 없다.


모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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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

난 절대 남겨지지 말아야겠다.

 

내 가슴...

내 심장이 제발 더 이상 새지 않았으면...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김기택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

오랜만에 친구들과 마주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들로 어느새 시간이 휙 지나갔고
헤어질 준비를 슬슬 할 때가 됐다.


내 어릴적 모습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척 귀엽게 생겼었다고 하는데...


그리고 보니
다른 녀석들의 어릴적 모습이 전혀 생각나질 않는다.
분명 많이 변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는데...


생각만 그랬던게지,
누가 봐도 40대 아저씨 아줌마들인걸...


어쩌다 한 번쯤은
지금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스스로 그려보고
잘 새겨놔야겠다.

엽서, 엽서

 

                         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 년 혹은 이 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 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내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는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 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누군가를 두고 있다는 것.


하지만 실상은 그 누군가를 진정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제대로 돌본 적이 없는 그 누군가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인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 누군가가 명확히 누구인지 없는 경우도 많고,
어쩌면 그게 결국 제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명확한 대상으로 존재한다면
비록 마음만으로라도 마음 씀에 소홀하지 말라.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가슴은 아직 뛰고있는 것이 확실하니...


그렇지 못하다면...
아, 이 아까운 청춘을 어찌한다...

그 섬에 가고 싶은 것은


                                       이생진


먼 섬 우이도
그 섬에 가고 싶은 것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그리움
그것이 무쇠 같은 침묵을 끌어간다


한번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음에도
너를 본 것처럼 시를 쓰는 것은
너도 그렇게 쓴 시를 읽어주고 싶어
바닷가를 걸었다는 이야기
그것이 잔잔한 파도소리로 이어질 때
내 가슴도 덩달아 울었다는 이야기
시는 그렇게 서로 부딪치는 이야기라고...

.....................................................................

우리나라 유일의 모래언덕 (沙丘)가 펼쳐진 곳이 우이도란다.
다도해 맨 끝자락의 전남 신안 도초에 있는 자그마한 섬.

그 섬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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