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의 동화


                           류시화


1969년 겨울, 일월 십일 아침, 여덟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내가 아직 이불 속에 있는데
엄마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넌 아직도
잠만 자고 있니! 나는 눈을 부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난 이제 열살이었다 버릇 없는 새들이 담장 위에서
내가 늦잠을 잔 걸 갖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외박 전문가인 지빠귀새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신발과 지붕들이 눈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붉은 열매들이 있었다
가시나무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그때 내 발자국소리를 듣고
가시나무에 앉은 텃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난 갑자기
어떤 걸 알아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내 삶을
지배하게 될 어떤 것이, 작은 붉은 열매와도 같은
어떤 것이 나를, 내 생각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겨울의 마른 열매들처럼
바람 하나에도 부스럭거려야 했다


언덕 위에서는 멀리
저수지가 보였다 저수지는 얼고 그 위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붉은 잎들 좀 봐, 바람에 날려가는! 저수지 위에 흩날리는
붉은 잎들! 흰 눈과 함께 붉은 잎들이
어디론가 날려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해 겨울의
마지막 남은 나뭇잎들이었다
..................................................................................

네가 가는 길이 옳다고 믿는 것이 맞다.
믿음 위에 길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감사가 있다.


사실이다.


믿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걸 알아야 돌아앉을 수 있다.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나아 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지혜는 언제나
그 다음에 오는 것.
바람처럼, 소리처럼
때로는
이슬처럼, 비처럼, 눈처럼
그렇게 오겠다.

목욕탕에서


                        고형렬


따끔따끔한 탕 속에 들어가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앞에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사람은 지난 12월 전방에서 제대를 했다 대학에 떨어진 아이는 거울 앞에 앉아 다리 때를 밀고 있다 옆에서 아이 시원타 아이 시원타는 늙은이는 뼈가 녹는 모양이다 좋은 아침, 해가 나서 새벽에 내린 눈이 얼어붙은 거리를 걸어갈 생각하니 즐겁다 욕탕 밖이 환하다(집은 봄처럼 창문을 활짝 열었겠지?) 천장 창 눈얼음이 햇살 이에 물린다 부스러진다
.....................................................................................

허벅지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 찌릿한 냉기가
등짝을 타고 목덜미까지 오싹하게 오른다
콧잔등과 귀가 시린가 싶더니 볼따구니가 얼얼하다


냉기는 어깨와 팔뚝을 타고 손끝에 절절히 전해지고
종아리를 타고 발목과 발가락 끝까지 모든 말초신경에 전달된다.
이제 온 몸이 차다


이런 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탕에
버석버석한 온 몸을 턱까지 푹 담그고
간질간질 녹이면 좋겠다.


떼루룩 떼루룩
눈두덩 타고 콧잔등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몹시 그리운 날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고정희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 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 앞에 드넓다
....................................................

 

일상의 소중함.

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일상.

하지만 모두가 귀할 수는 없지.

 

한 가지도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어.

늘 애쓰고 마음 쓰고 먼저 행동하는 것이 맞지.

고민하고 주저하기 보다는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맞지.

 

요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감사하는 것이 기도라면,

항상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용기 내서 일어서고

옳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맞지.

 

한 발 먼저 그리고 한 시 바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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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서정윤


사랑하는 이여
나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어 주오


여기 들꽃처럼 피어
긴 세월의 한 점을 지나간,
사랑으로 살다가 흙으로 사라진
고단한 영혼이 잠들어 있네
사랑은 기쁨의 순간보다
고통의 나날이 더 많은 것을
하지만 짧은 환희가
머나먼 날들의 힘겨움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가슴에 있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깨달아
영원히 꿈틀대며 기어다닐 것 같았던
배추흰나비 애벌레처럼
미래의 준비된 계획을 알지 못해 허둥대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놀라
파도처럼 뒷 물결에 떠밀리어
바위에 가서 깨져 버린 상처 많은 시인이었다고


사랑하는 이여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그대 위해 있고
내 생각의 큰 부분이 그대 향해 있네
순간순간 내 마음의 진실을 말하지만
그것이 진리가 되지는 못하였기에
나는 꽃이 진 들풀이 되어
거친 새들로부터 씨앗들을 지키고 있네
그대를 구름의 높이로 올리네
....................................................

이제와 내 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 보잘 것이 없다.
그래도 이리 적어주면 좋겠다.


한 세상 잘 놀다 간 사내가
이 생에서는 좀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어
다음 생에는 더 잘 살아 보겠노라 다짐하고 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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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언젠가 수를 셀 때, 앞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른지 아니면 뒤에서부터 세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할지 헤어지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나와 이별하는 사람이 새롭게 만나는 사람보다 많아졌다는 걸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게 남은 날이 또 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내가 남기고 갈 것도, 가지고 갈 것도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지금의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하려면 많이 내려놓고, 비우고, 덜고 가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함께 가자고 마주 잡은 손을 언젠가는 놓아야 한다. 살다 보면 각자의 길을 갈 때가 온다.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친구, 선후배, 동료, 연인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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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형기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

고비사막 한 가운데서 죽을 고비를 넘고
살아 돌아온 한 젊은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도 죽는 것 보다는 낫다는 걸 알았단다.


저걸 알만큼 고통스러웠구나 싶어
가슴 아프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살다 보면 종종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쳐야
겨우 한꺼풀 벗고 새로운 한 살이를 얻곤 한다.
하지만 그 한 살이도
늘 준비하고 구별하고 기도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몫이다.


삶은 결국 기꺼이 견디는 것이고
당연히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마땅히
살고 싶어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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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우리 삶에서
기도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오직 기도만 하고 살면 될 것이다.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을
기도로 모두 구해야 한다면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살아도 터무니없이 모자랄 것이다.


살기 위해 끝없이 구하지 않아도 편안히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살아있음으로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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