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


                                      조용미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 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 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城, 깨진 옹기 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메달아 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게 익는다
내가 그걸 탁탁 터뜨린다 옛집이 잠시 붐 빈다


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이사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 달을지 모른다
옛집은 낙타의 걸음걸이로 세월을 향한다
.................................................................................................

폴모리아 악단의 밤안개속의 데이트가 나올 때 쯤에
입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사무실 한 켠 골방에 버려진 세 아이가
차디찬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폈다.
라벨의 볼레로가 시커먼 레코드판을 돌리며 자작거릴 때 쯤에

죄없는 몸뚱이 뉘인 자국만 이부자리에 젖은 채로 남아있었다.
화농처럼 들러붙은 눈곱을 떼고 이부자리를 사무실 탁자며 소파에 펴서 널 때 쯤에
카펜터스의 Sing이 울려퍼진다.

Just Sing, sing a song.
La la la la la...

새나라의 어린이들의 새로운 아침이 또 밝아왔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해자... 바다   (0) 2014.03.05
조성자... 소리의 길  (0) 2014.03.04
이동호... 세탁기   (0) 2014.02.28
문태준... 누가 울고 간다   (0) 2014.02.27
김주대... 형편대로  (0) 2014.02.19

세탁기


                       이동호


아내가 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한다
아내의 완력에 빨래처럼 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소불위한 잔소리의 권능에 못 이겨
끝내 구겨져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탁기 속에도 사계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세탁기가 지구처럼 자전한다
몸이 바닥의 회전 날을 축으로 공전하는 동안
내 몸통 속에서 아름답게 꽃이 피고 지고
졸졸 시냇물이 흐르고
물거품이 해조처럼 밀려들 적마다
내 속으로 신호가 밀려와서 자라고
머리에서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울리곤 했다
내 몸의 각질이 낙엽처럼 내 주변을 떠돌았다
시베리아 벌판을 고사목처럼 걸어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원하는 내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젖은 아내의 명상 속을
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곧 탈수될 것이다
햇볕 소용돌이치는 어느 베란다에서
말 잘 듣는 강아지풀처럼 뽀송뽀송
잘 건조될 지도 모를 일이다
................................................................................

결코 짧지 않은 30여년을 따로 산 남남이
하나의 뿌리로 얽혀 산다는 것이 어찌 수월할까?


뿌리 내리기도
꽃 피우기도
열매 맺기도
낙엽 떨구기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겠지.


한 순간도 애쓰지 않고 되는 것이 있었던가?
서로 제 욕심 좀 버리고 양보하고
서로를 위해 좀 배려하고 이해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야겠지.


혼자 나서, 혼자 가는 인생
반평생 그렇게 어울려 살다 가겠지.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성자... 소리의 길  (0) 2014.03.04
조용미... 옛집   (0) 2014.02.28
문태준... 누가 울고 간다   (0) 2014.02.27
김주대... 형편대로  (0) 2014.02.19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0) 2014.02.17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

흘린 눈물만큼
아픈만큼 알게 되는 거 맞다.
맞다.
남아있는 눈물이 이렇게 많았던가?
소매로 베갯잇으로 스며
흔적은 사라지는데
가슴엔 불이 붙는다.


얼마나 겪어야 이 아픔이
얼마나 아파야 이 고통이
끝 날까
끝이 날까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용미... 옛집   (0) 2014.02.28
이동호... 세탁기   (0) 2014.02.28
김주대... 형편대로  (0) 2014.02.19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0) 2014.02.17
이상국... 리필  (0) 2014.02.13

형편대로


                          김주대


술파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녀는 내 형편을 사랑했고 한동안 나는 외로움을 잊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떠났다

 
형편 좋은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내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의 말만하다가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한다.
아무리 얘길 해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입장의 차이가
강북과 강남을 가로지르는 한강 폭만큼은 되는 듯하다.


나도 할만큼 했고 너도 할만큼 했다.
서로 잘못한 것도 잘한 것도 없으니 그만하자
그렇다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말아야 했다 싶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입장대로만 이해하고 말하게 될테니...


그러니 다 이해한다는 말은 사실...
거짓에 가깝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동호... 세탁기   (0) 2014.02.28
문태준... 누가 울고 간다   (0) 2014.02.27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0) 2014.02.17
이상국... 리필  (0) 2014.02.13
김종길... 고갯길  (0) 2014.02.12

꿈, 견디기 힘든


                                   황동규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 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 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 가고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에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살얼음 깔린 진흙 바닥에서
나는 누군가와 녹초가 되도록 뒤엉켜 싸웠다.
내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의 턱을 향해
남아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깜짝 놀라 잠이 깬다.
내 옆에 누운 작은 보퉁이만한 아이의 가녀린 갈빗대가 만져진다.
다행히 그 가녀린 몸통에 내 주먹이 닿지 않았다.


새벽 3시 34분
밤 새 치른 백병전의 분노가 채 가라앉지 않았다.
거울엔 붉어진 흰자위 핏줄 하나하나가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전쟁같은 지난 시간의 그림자가 부연 물때로 앉았다.


다시 잠자리로 돌아와
작은 보퉁이만한 아이 몸통을 가만히 안아 본다.
억지로 감싸 안은 팔을 벗어나려 꿈틀거리는 아이를
다시 끌어다 안는다.
차라리 아이의 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양.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태준... 누가 울고 간다   (0) 2014.02.27
김주대... 형편대로  (0) 2014.02.19
이상국... 리필  (0) 2014.02.13
김종길... 고갯길  (0) 2014.02.12
이상국... 나의 노래   (0) 2014.02.10

리필


               이상국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다.


몸도 잘 쓰고
마음도 잘 쓰고
머리도 잘 쓰고
시간도 잘 쓰고
돈도 잘 쓰고


선하게 의롭게 이롭게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주대... 형편대로  (0) 2014.02.19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0) 2014.02.17
김종길... 고갯길  (0) 2014.02.12
이상국... 나의 노래   (0) 2014.02.10
이병률... 생의 절반  (0) 2014.02.07

고갯길


                     김종길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

살아서 맺지 못하는 연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도 끊지 못하는 연이 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것이
참 복잡하고도 알 수 없는 것이라
이 인연은 끈은 어디서 시작된 것이고
어디까지 이어져 있으며
또 어디서 끝이 나는지...


아, 아버지...

그럽시다.
죽어서도,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버지, 아들하고 삽시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0) 2014.02.17
이상국... 리필  (0) 2014.02.13
이상국... 나의 노래   (0) 2014.02.10
이병률... 생의 절반  (0) 2014.02.07
김종길... 매화   (0) 2014.02.07

나의 노래


                       이상국

 

우리 어머니
처녓적 자시던 약술에 인이 박여
평생 술을 자셨는데
긴 여름날 밭일하시면서
산그늘 샘물에 술을 담가놓았다가 드실 때면
나도 덩달아 마시고는 했지요
그리고 어린 나는 솔밭에서
하늘과 꽃과 놀며 소를 먹이고
어머니는 밭고랑에서 내 모르는 소리를 저물도록 했지요


지금 내 노래의 대부분은
그 흙 묻은 어머니의 소릿자락에 닿아 있지요
.....................................................................................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고향무정이라는 노래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이 기막힌 정서는 도대체 어디에 닿았는지
뭉클하게 콧등을 쥐어박고 눈물을 쏙 빼더니만
가슴 한복판에 서늘하게 내려앉는다.
오늘은 목조차 메어 노래고 뭣이고 다 글렀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국... 리필  (0) 2014.02.13
김종길... 고갯길  (0) 2014.02.12
이병률... 생의 절반  (0) 2014.02.07
김종길... 매화   (0) 2014.02.07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0) 2014.02.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