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송이 눈
.................................................................

봄이 지척인가 싶었는데
아침부터 묵직하게 내려앉은
허공 따라
팔랑팔랑
가볍디 가볍게
봄 눈이 날린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맴돌며
언제까지나
바닥에
내려앉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제 이별하자는가?
바닥에 내려앉은
흔적조차 말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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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없고

 
                            이병률

 
혼자 보내서 어떡하나 했다
가는 것은 가는 것이나
가고 마는 것은 또 어쩌나 했다


안경을 걸치건
눌러 쓴 글씨는
자국이라도 남기겠지만
그러겠지만


지나는 것은 지나는 것이리


보이지 않는 것은 애써 덮은 것이리


있고 없고를 떠난 세상으로
또 오지 않을까 했다


찬란을 만들지 않을까 했다
슴슴한 눈발이라도
서랍 속으로 뜨겁게 서랍 속으로 내리지 않을까 했다

....................................................................................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정도인 것은 알지.


언젠가부터 이별이 많이 익숙해졌다.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좀 서운하기는 하다.
아주 가끔은 그리울 때도 있더라.


오늘 또 한 분과 이별했다.
평생 잘 놀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잘 사신 분이라
아쉬울 것은 없다.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은 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이 좀 안타까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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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화석


                   박후기


사랑한다면
눈물의 출처를
묻지 마라


정말로 사랑한다면
눈물의 출처를
믿지 마라
.....................................................

요즘 눈물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티비를 보다가도 울고
노래를 듣다가도 울고
청소를 하다가도 울고


하지만 딱히 이유도 없는 눈물
대체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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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나희덕


나는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본다


텃밭에 나가 귀퉁이가 찢어진 열무잎에도 대보고
그 위에 앉은 흰누에나방의 날개에도 대보고
햇빛 좋은 오후 걸레를 삶아 널면서
펄럭이며 말라가는 그 헝겊조각에도 대보고
마사목에 친친 감겨 신음하는 어린 나뭇가지에도 대보고
바닷물에 오래 절여진 검은 해초 뿌리에도 대보고
시장에서 사온 조개의 그 둥근 무늬에도 대보고
잠든 딸아이의 머리띠를 벗겨주다가 그 띠에도 슬몃 대보고
밤늦게 돌아온 남편의 옷을 털면서 거기 묻어온
개미 한마리의 하염없는 기어감에 대보기도 하다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이 있어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지만
참 알 수가 없다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 있을 뿐
..............................................................................

말 마다 추를 달 일은 아니다.
말은 그저 말일 뿐...
실은 말에 무게를 다는 건 결국 나인데...


빠져 나오려 허우적거릴수록
자꾸만 빠져드는 생각의 늪에서
그 사소한 말에 묵직한 추를 줄줄이 매단 것은
결국 나였음을...


있는 사실만 생각하고
보이는 것만 얘기하자고
단단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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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독

 
                 이화은
 

파도의 첫 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어머니의 언문 편지처럼
띄어쓰기도 없이
가득가득 갈매기 날아올라
문장은 길어지는데
질문은 자꾸 늘어나는데
바다는 벌써 나를 덮으신다
단숨에
다 읽혀버린 내 삶이
너무 가벼웠다고
한순간
................................................................................

어제는 밤 늦게까지 뭐라도 곧 한바탕 쏟을 기세로
무겁게 무겁게 내려앉은 하루


날이 저물도록 끼니도 못 챙겨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저녁끼니 보다 잠을 먼저 청한다.


바닥에 널브러진 낙지마냥 방바닥에 퍼져 늘어져 있다가
이런게 사는 건가 싶으니
저절로 눈 감기는 것도 다 서럽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르디 푸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밤새 흘린 눈물은 흔적도 없다.


아, 아주 가끔은
가볍디 가벼운 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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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며 울었다


                                 한두이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보며 울었다.


엄마와 살자니 아빠가 안됐고
아빠와 살자니 엄마가 가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빌리.


그 애가 불쌍해서 운 게 아니고
그 애가 부러워서 울었다.


엄마랑 살까? 하니 엄마가 돌아앉고
아빠랑 살까? 하니 아빠가 먼눈팔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그 애가 부러워서 울다가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

아이들과 발씨름을 하다가 아이의 사소한 발길질에도
내가 자꾸만 맥없이 홀랑 뒤집어진다.


그 모양새가 우스운지 아이들이 배때기를 쥐고 웃는데
나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 멈출 수가 없다.


'아빠 슬퍼?' 하고 묻는 아이의 물음에
내가 자꾸만 뒤집어지니 억울해서 운다고
핑계김에 대놓고 줄줄 울었다.


아이가 건넨 수건이 다 젖도록
나는 자꾸만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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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김해자


넓어서인지만 알았습니다
깊어서인지만 알았습니다
억 겁 세월 늙지 않아 늘 푸른 당신
제 몸 부딪쳐 퍼렇게 멍든 줄이야
제 몸 부딪쳐 하얗게 빛나는 줄이야


흘러오는 건 모두 받아들이는
당신은 지금 이 순간도 멍듭니다
미워하지 마라, 다 받아들여라
생채기는 늘 나로부터 생긴다는 듯
생채기 없인 늘 푸를 수 없다는 듯


흐르고 흘러 더 낮아질 것 없는
당신은 오늘도 하얗게 피 흘립니다.
스스로 나누고 잘게 부수면
아무도 가를 수 없다는 듯
거대한 하나가 된다는 듯
................................................................

애초부터 슬픔은 푸른 색이었을까?


엄동설한 삼남매가 쭈그리고 잠을 청하던
차디찬 골방에서는 분명 푸른 입김이 났다.
쉰 해도 못 채우고 영혼이 떠나버린
내 아버지의 굳어진 낯빛은 분명 푸른 빛이었다.
절망만이 남았던 서울 한복판의 캄캄한 강변에는
분명 푸른 감촉의 바람이 일었고
고통의 절정에 선 순간, 푸른 향이 머릿 속에 번졌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아 있는 저 수평선엔
분명 서로 다른 푸른 색이, 슬픔과 그 무엇이
또렷이 나뉘어져 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슬픔은 푸른 색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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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길


                         조성자

 
들을 만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는 듯
귀 자꾸 어두워 가는 어머니
소통의 통로가 자주 교신 불능이다
더 들을 것 이제 없다는 듯
댓잎 같이 귀를 치켜세우고도
아득한 동문서답이다


들을 소리 못들을 소리가 한 통속으로 드나들던 와우각이, 전쟁의 참화나 아들의 죽음이 무서리로 내려 피를 사위던 소리의 입구가, 가난은 그쯤에서 그만하면 차라리 고마웠고 바람기 잦은 사랑채를 쓸고 닦다가 몇 번씩 혼절하고도 모든 풍문을 은닉하던 귀청이, 손을 놓고 묵묵부답이다

 
데시빌 강도 높이는 보청기로도
한번 돌아 앉은 마음
돌이킬 방도는 없는지
이승의 소리는 모두 부질없다는 듯
호접란 벙그는 것도 잊고 코 골며 주무신다
....................................................................................

인간관계의 끝은 불통이다.
각자의 언어로 제자리에서 자신의 말만 되풀이하여
상대를 이해할 수도 없고 소통할 방법도 없다면
그게 끝이다.


바벨탑에서 그러했다.
어느 날인가 서로가 쓰는 언어가 달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쩌면 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 바로 그것이었겠다 싶다.


어처구니 없게도 우리는 종종 제 말만 하고
남들이 다 이해하고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제 말을 줄이고, 마음을 열고, 구별해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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