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은 정갈하게 닦여있고,
가만히 모은 손등에 닿는
바람이 싱그럽다.


그늘 진 길 모퉁이엔 아직
살얼음이 깔려있는데,
산수유 나뭇가지엔 어느새
곳곳에 움이 텄다.


언제 까치 울음 소리가 아득히
숲에서 들렸던가?


가느랗게 번진 햇발 사이로 괜시리
두근거리는 마음은
눈도 채 녹지 않은 건너편 가파른
산 길을 성급히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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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편지  
 

                          김명은


그대에게 나에게
오가지 못한 말
부딪치지 못한 눈빛
저 달이 머금었다 했습니다


먹구름 가득 낀 날
그믐밤은 어쩌라고
슬픔의 진주
희망을 잡은 듯 하셔요


자다 깬 달콤한 꿈
다시 누우면 그 꿈 아득하여
아쉬움 남는 일
겨울날 바람꽃 만큼입니다


달빛 비추는 세상에는
단 한사람 때문에 잠들지 못한
애처로운 가슴 하도 많아


하얀 입김이 끌고 다니던
나의 어둔 그림자
그대 밟는 새벽길
차가운 이슬로 내려앉았습니다

...................................................................

오늘 새벽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았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다.
다시 꽁꽁 싸맨 걸음 걸음...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건,
바싹 마른 나뭇가지 속에 움이 그렇고,
살짝 들 뜬 땅속에 새싹이 그렇고,
매서운 독기가 좀 가신 새벽 바람이 그렇다.


오랜 기다림의 싹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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