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길
 

                  정호승

 
제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방은 칠흑같은 어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텅 빈 공간의 고요
차가운 핸들에 엎드려
가슴치며 울었던
마치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샤워기 물소리,
북받치는 울음을 참는 구역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곁을 스쳐가는 차가 일으킨 바람소리...


어지러이 사방으로 번지던 소리가
커다란 배수구로 빨려 내려가듯 후룩!
일순간, 사라졌다.


흠뻑 젖은 차 창에 빼곡히 맺힌
눈물, 눈물, 눈물
창을 타고 빗줄기 한 줄기
주룩 흘러내릴 때,
동시에,
내 관자놀이를 타고
생살을 찢어낼 듯 예리하게
흘러내리는 싸늘한 땀방울


이 순간!

살아있다.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명시 감상 5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철... 시 읽는 시간  (0) 2013.04.05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0) 2013.04.03
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0) 2013.03.21
이생진... 편지 쓰는 일  (0) 2013.03.19
천상병... 편지   (0) 2013.03.18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장미가 함박 피어있었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은 나를 채근하느라 힘을 다 뺐다.
무기력해진 내가 더 맥없어 보일 때 쯤,
화려한 장미의 향연이 펼쳐져 있음을 그제서야 보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향연도 끝날 때가 가까웠음을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탐스럽게 피었다 싶은 장미에 손을 대자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핏빛 꽃잎...


내 맘 속에 열정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가라앉혀야 할 때를 알게 된 것일게다.


다음을 위하여...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이해인...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0) 2011.07.07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봄비 1    
  
                   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봄비 2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

화려하고 현란한 봄 꽃의 향연이 막을 내릴 즈음,
이젠 그 열기를 식히려는 듯
가만가만 종일토록 봄비가 내립니다.


빗방울이 지글지글 우산에 듣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사랑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 거립니다.


다시 우산 아래의
지글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생각에 젖어봅니다.


이미
우산도
길도 다 젖었습니다.


내 옷소매도
바짓가랑이도 다 젖었습니다.


혹시
내 마음이 젖을까봐
얼른 옷깃을 여밉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