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오세영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멀리 있는 것은 별이 된다.
멀리 있으므로 기억이 흐린,
흐려서 윤곽이 선명치 않는 너의
이,
목,
구,
비,
강 건너 반짝이는 불빛, 혹은
대숲에 비끼는 노을 같은 것,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아름다운
안개꽃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흐르는 은하
한 줄기.
...................................................

 

멀리 있는 것은 별이 된다.
사랑은 안개꽃이다.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아름다운...


멋진 표현이지만 슬프다...
저 은하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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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랑

 

                김초혜


소리를 내면 깊은 강이 될 수 없다

..........................................................................................................

1964년 등단한 후로 연작시 '사랑굿' '어머니' 등으로 너무나 유명한 시인이다.

 

'사랑굿' 이라는 연작시는 총 183편으로 일단락이 된다.

'감정의 수많은 단층으로 쌓인 체험을 한 편의 시로 끝낼 수 없어... ' 라는 시인의 말처럼

그녀의 수십년의 삶에 대한 말이 켜켜히 쌓여 길이길이 남을 연작시를 이루어냈다.

 

물론 시인의 노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소설가 조정래씨의 아내이기도 한 그녀의 시는
사람과 삶과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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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자면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래, 사랑을 하기 위해 살자.


그래도 외로울 때,
마음에게 편지 한 장 적어 보자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천천히
기다리다 마음을 접고,
바라보다 눈을 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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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공광규

         
새를 사랑하기 위하여
조롱에 가두지만
새는 하늘을 빼앗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꺾어 화병에 꽂지만
꽃은 이내 시든다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 마음에 그물 쳤지만
그 그물 안에 내가 걸렸다 


사랑은 빼앗기기
시들기
투망 속에 갇히기.
....................................................

가둬놓고 사랑하려니까 힘이 들다.
소유하려 하니까 사랑이 쉽지 않은게다.
누군가를 위해 사랑한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다.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이 만큼 주었으니 하면서
상대에게 적어도 이 만큼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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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幸福)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요즘, 시(詩)에 푹 빠져 사는 나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나를 보면 어떤 시가 생각이 나느냐고...'

 

짧은 순간, 많은 시와 사람과 사건과 시간들이 생각나고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적어 보냈던 시(詩)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읽었던 시(詩)

누군가를 보내며 읽었던 시(詩)
누군가를 위하여 썼던 시(詩)

그래, 우리는 늘 서로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산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을 나눌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산다.


시(詩) 한 편으로 마음을 전하고 나눌 수 있다면
사랑을 전하고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시(詩)를 전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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