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이근우


가을엔
찻잔 속에 향기가 녹아들어
그윽한 향기를
같이 느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가을엔
가슴을 터놓고 쌓인 얘기를
서로 부담없이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가 그립습니다.


가을엔
밫바랜 추억도 더듬어 보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받쳐들고
빗소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가을엔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고
찬바람 불면 낙엽지는 소리에
더욱 공허한 마음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

어쩌면 저 하늘은 저리도 빨리
파란색으로 가을 옷을 갈아입는지...


어쩌면 저 황금 벌판은 저리도 빨리
누런 황금색 물이 드는지...


어쩌면 저 가녀린 억새는
허옇게 세버린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서글프게 섰는지...


수 십년을 마주치는 가을 바람이건만
오늘은 왜 자꾸만 가슴이 시려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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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신용선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사랑인 것을


그대를 잊기 위하여
살갗에 풀물이 밴 야영의 생애를
이끌고
바닥에 푸른 물이 고인 아득히 오래된
마을,
그대의 귀엣말보다 더 낮은 소리의 세상으로
내려가기도 했었네.


제 울음 다 울고 다른 울음 바라보는
아무 그리움도 더는 없는
키 큰 갈대가 되어
귀 기울여 바람소리 아득히 들리는
먼 강변에
홀로
서 있기도 했었네.

.......................................


억새

                          신용선


간결해지기 위해
뼈에 가깝도록 몸을 말리는
억새처럼


저절로 알아먹었던 유년의
말 몇 마디만 남기고
다 버리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갈기가 되어
달리다가 일어나고


달빛이 들면 있지도 않은 이별을 지어
손을 흔드는
억새처럼


속없이 살고 싶습니다.
눈물로도 와해되지 않는
세상의 일들 잊고

.........................................................................

말과 소리, 글과 눈, 가슴과 눈물, 그리고 바람...

스러져 누울 때까지 홀로 서 있어야 한다는 인간의 숙명을

그 누구인들 벗어날 수 있을까마는

가벼이 보내려 애 씀을 '삶'이라 할 밖에...

생전에 단 한번 마주치지 못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그의 발자취를,

그의 흥얼거림을 고스란히 뒤따라 가며 듣고 있다.

이 가을... 저 강변 어딘가에서, 저 산모퉁이를 돌면

다시 그의 노래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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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둥산

 

                                 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그녀의 감각적인 시어를 따라잡으려면
늘 한 번씩 다시 되새김질 해 곱씹어야 한다.
한 번 훑고 지나가서는 아랫도리만 부풀어 오를 뿐
그 감각을 제대로 깨우지 못한다.

 

한 번은 시작이라서 짧고 강하게...
두 번째 쯤에 제대로 힘을 써 볼 요량이라면
한마디 한마디 끊어보아야 한다.

서서히, 찬찬히, 세심히, 가만히 가만히 살펴야 한다.

 

오늘 그녀를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마주해 봐야겠다...

 

잠시 덮은 눈거풀 위에 민둥산 새하얗게 펼쳐진 억새밭이 아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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