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열 몇 살의 어린 소년에게 그의 시는
한 단어, 한 단어, 한 줄 한 줄이 모두 감동이었다.

그의 노래에 취해 난 반드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후로 스물 몇 해가 더 지났다.


그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소년은 세상을
젊은 시절 요절한 시인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으며,
그의 노래를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어느 흐린 가을 날,
한 천재 시인의 글을 다시 읽는다.
다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자화상 (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

늦은 밤,
집으로 가는 언덕을 비척비척 올라가다

언덕 마루 너머

하늘 가운데 쾅! 박혀있는

반달과 눈이 마주쳤다.


달이 언제부터 저 자리에 걸려 있었을까?


달이 무척 가깝게 보이고,

입가에 살짝 스친 미소가 막 지나친 뒷 골목으로

사사삭 자취를 감춘다.

 

파아란 바람이
땀이 살짝 밴 등짝을 민다.
아무것도 못 걸친 팔뚝에 얇은 소름이 돋는다.


얼른 들어가야하는데,

오늘은 유난히
땅바닥이 조금씩 흔들리고
발걸음이 무겁다.

'명시 감상 2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기택... 고모생각  (0) 2009.09.30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0) 2009.09.23
이병기 시/ 이수인 곡 ... 별  (0) 2009.09.09
한강... 괜찮아  (0) 2009.09.09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0) 2009.09.02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라이너 마리

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요즘 자꾸만 윤동주 시가 눈에 걸린다.
가을이 배경이라 가을 어느 한 녘에 어울릴 것 같은데,
봄이 올 것만 같은(?)
이런 안개 자욱한 아침에도 잘 어울린다 싶다.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천재시인 윤동주 님의 시 입니다.


주옥같은 한마디 한마디의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골목한 모퉁이에서 인생을 만나고 사랑을 만나고

영혼을 만나고 별을 만납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도 생각에 잠깁니다...


맑은 영혼의 노래를 듣습니다...
두고 두고 내 귓전을 맴돌아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가림...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0) 2008.07.14
손택수...거미줄  (0) 2008.07.11
안근찬....하늘 인연처럼 사랑하기  (0) 2008.07.08
도종환... 벗 하나 있었으면  (0) 2008.07.08
김춘수... 꽃  (0) 2008.07.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