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일기


                    이해인

 

비 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

기나 긴 비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사나운 빗줄기에
시름마저 깊어져
자꾸만 젖어가는 어깨
자꾸만 되뇌어지는 상념들


눅눅해진 마음 한 곁에 촛불 밝혀 줄,
시름 한 잔 함께 기울일
따스한 햇살 같은 사람이
그리운 날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사인... 조용한 일  (0) 2011.08.16
도종환... 접시꽃 당신  (0) 2011.08.05
마종기... 우화의 강  (0) 2011.07.28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이해인


그대 그리움 한 잔에 커피 잔에 물을 따르는 순간부터
그대 향이 마음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커피를 유난히도 좋아한 그대의 그윽한 영상이
커피향 만큼이나 나의
온 몸을 감싸고 피어오릅니다


오늘의 커피에는 그대의 이름을 담았습니다
나의 목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퍼져오는 따스함은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입니다


그대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혼자만의 고백을
은은한 향으로 피워 올리며
그리움이 가라앉은 커피를 동그랗게
흔들어 마십니다


커피 한 잔에 그대 그리움 한 잔에
언젠가 만날 그 날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

티스푼이 놓인 커피 받침...

그리고 커피 한 잔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산행 2  (0) 2011.07.14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0) 2011.07.13
김상옥... 어느 날  (0) 2011.06.29
이형기... 낙화(落花)  (0) 2011.06.28
오세영... 봄비  (0) 2011.06.23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 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 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 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

 

달콤한 치자꽃 향이 솔솔 풍기는 듯 합니다.
수녀님의 말처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