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박완호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

 

가끔, 아주 가끔씩은 챗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어디로든 멀리 가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공간적으로 '멀리'는 아니더라도, 일상을 탈출해서 어디론가를 향해서 떠나고 있음을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 공간을 벗어나지 못해 어디론가로 가고 있지 못하더라도 일상을 잠시 잊고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간이 아릿한 추억과 맞닿아 살짝 찌릿해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


이 시가 그러하다.
감각적이고 함축적인 짧은 한 문장이 수많은 장면과 겹치면서 아련한 추억속의 감각을 살짝살짝 일깨우고, 야릇한 향기를 은근히 뿜어낸다.

글을 읽다보면 저 아래에서 묵직한 자극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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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중심


               이화은

 
꽃은
그 꽃나무의 중심이던가
필듯말 듯
양달개비꽃이
꽃다운 소녀의 그것 같아
꼭 그 중심 같아
中心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흘러와 있는가
꿈마저 시린
변두리 잠을 깨어보니
밤 사이 몇 겁의 세월이 피었다 졌는지
어젯밤 그 소녀 이제는 늙어
아무 것의 한복판도 되지 못하는
내 중심 쓸쓸히 거기에
시들어
...............................................................................

곁을 지키며 바라봐주는 것의 든든함을
마음 한 장 얹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고마움을
너를 통해 느끼곤 했었다.


지금 네가 내 곁에 없어도
어딘가 있을 테니...
그것도 아주 잘 있을 테니...


그것이면 충분하다.

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

 

당대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를 꼽으라면 난 서슴치않고 휘트니 휴스턴을 꼽는다.

풍부한 감성과 넘치는 에너지, 거기에 뛰어난 가창력까지 겸비한 그녀는 최고의 여성보컬임에 틀림없다.

 

아쉽게도 그녀 역시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녀의 음악은 오래 오래 남아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녀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부디 좋은 곳에서 멋진 영생을 누리길...

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내가 가진 것, 가질 수 있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꺼내본다.
참으로 변변히 잴 것도 없는 품새에
펼쳐보기도 부끄러워 얼른 걷어치운다.


10년을 키운 화초들은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를 갖춘 것들도 좀 있다 싶은데,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고, 예전 사진을 보니 나는 10년동안 늙기만 했다.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 나니,
자작나무 같은 시인은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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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님도 울고 넘는 천둥산 박달재를 넘어 단양에 도착했다.

 

강물은 얼어붙었고, 바람은 매서웠지만,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하니 마음만은 훈훈한 여행이었다.

 

 

각자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친구들.

한마디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냈다.  개인적으로도 변동과 갈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내년에 다시 모일 때에는 더 멋진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해 본다.

절정을 복사하다


                            이화은 
 

예술의 전당에서 이만 원 주고
클림트의 키쓰 복사본을 사 왔다
트윈 침대 만한 북쪽 한 벽에
햇솜 같은 할로겐 불빛을 짙게 깔고
그들을 눕혔다 이건 아니다
너무 진부했다
매양 여자가 아래에 깔리는 체위
뒤집어 여자를 위로 올렸다
마침 티브이에서 못 생긴 여자가
여성 상위에 대해 침을 튀기고 있다
못생길 수록 위로 올라가고 싶어한다고
이 시각부터 그렇게들 생각한다면
고즈넉이 남자의 입술을 먹고 있는
이 여자는 너무 아름답다
다시 일으켜 세웠다
불빛이 주르르 발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체위에 관해서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 입맞춤이 끝나고 그들은 눕던가
헤어져 돌아가던가 할 것이다
한국 영화처럼
끝까지 다 말해 버리지 말자 하지만
이 숨막히는 정적
한순간만은 다시 복사해
내 가장 숨막히는 시간 속에
걸어두고 싶다
.......................................................

숨이 차도록 가슴 벅차오르던 순간,
그 순간을 기억해 보려 애를 써본다.
언제였던가?
아니 무엇이었던가?


숨막히는 한 순간을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가끔은 시 한 편 읽어 보기도 만만치 않다.

여유란 가지려고 갖게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주어지지도 않는 듯 하다.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그냥 '짬' 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잠깐 짬을 내서 이 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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