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눈부신 가을 날의 푸르름을 이보다 더
명징하고 멋드러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꽃이 아름다운 것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요,
우리네 청춘이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리니

그래, 이 가을 눈물 나도록 그리운 이가 있다면
저 높푸른 하늘 한가운데 뭉게구름 한 덩이로 그려놓고
죽도록 그리워해보자꾸나...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혜원...가을을 파는 꽃집  (0) 2008.09.25
박인환...목마와 숙녀  (0) 2008.09.22
이정란...악기 사러 가는 길  (0) 2008.09.16
김종목...기다림  (0) 2008.09.09
김종해...우리들의 우산  (0) 2008.09.01

악기 사러 가는 길

 

                                        이정란
 

무궁화 악기점 진열대에 첼로가 서 있다
유리창에 이마를 들이대고
초롱한 눈빛으로 창 밖 거리의 악보를 읽는다
첼로의 느슨한 줄이 내 눈길 쪽으로 당겨지자
도시의 오후가 팽팽해지고
음을 맞추는 소리 붕붕거린다
유리창 안에 어른거리던 노래의 한쪽 문이
열리고 파도치듯 흘러나온
세바스찬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이
가을비에 떨어진 은행잎의 속살 속으로
아득히 젖어든다
생의 한 줄이 끊어진 사람들의
잃어버린 음표가
굵어지는 빗소리에 떠내려간다
부르튼 손가락으로 슬픔을 짚어 가는
얼굴들을 매단 낡은 악상 한 대
신호등에 걸려 주춤거린다
마지막 한 소절을 향해 달려간다
누군가 가슴줄을 뜯고 있을 때
소리를 잃은 관악기들이 목쉰 울음을 꺾어
삼키며 지하에 웅크려 선잠을 잔다

................................................................

 

요즘 통기타를 한 대 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있는 기타도 제대로 퉁길 일이 없이
거치대에 늘상 멀거니 서 있는데 말이다.
이제와서 특별히 소용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갖고 싶은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 눈에 들어온 기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통기타 소리가 그립고
통기타의 울림을 가슴팍으로 듣고 싶고

 

그립다.

 

그래...
세바스찬 바하의 무반주 협주곡도 듣고 싶다.

 

그러고 보니....
DSLR 카메라도 한 대 갖고 싶었는데...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인환...목마와 숙녀  (0) 2008.09.22
서정주...푸르른 날  (0) 2008.09.17
김종목...기다림  (0) 2008.09.09
김종해...우리들의 우산  (0) 2008.09.01
김재진...너를 만나고 싶다  (0) 2008.08.29

 기다림

 

                        김종목
 

기다린다는 것은

잠시 허망에 빠지는 일이다.

그가 오리라는 확신이 차츰 허물어지며

통로 저쪽 문 밖까지 나가 선 나의 간절함이

차츰 아픔으로 기울어진다.

쓸쓸한 음악이 흐르는 찻집,

석양이 얼비치던 창도 커피색이다.

오리라는 기약이 있었던가

잠시 나의 기억을 의심해 본다.

시간은 굴삭기처럼 가슴을 파고 들고

점점 내 앞자리의 빈 공간이 더 커진다.

쓴 커피를 다시 한 잔 시키고

부질없이 성냥개비를 분질러 숫자를 세고

지나간 날들이 다 헐릴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숨통을 끊는 일이다.

때로는 기쁨으로 가슴 설레다가

차츰 커피잔이 식듯 아픔과 쓰라림과 절망으로 이어지는

형벌 같은 것.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절절함 속에서

모질게도 단련되고 길들여지는지.

오늘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기다림을 놓아둔 채 찻집을 나선다.

저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꺼질 듯 꺼질 듯한 사랑을

애틋하게,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

가슴이 저려옵니다.

당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그 시간들,

그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이 순간들,

가물가물 꺼져가는 그 아픈 기억들,

가공할만한 시간의 파괴력으로

그 기억들이 꺼져가고 있지만,

아직 내 가슴이 이토록 시린 까닭은

아직 이 세상에서 함께 숨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푸르른 날  (0) 2008.09.17
이정란...악기 사러 가는 길  (0) 2008.09.16
김종해...우리들의 우산  (0) 2008.09.01
김재진...너를 만나고 싶다  (0) 2008.08.29
김선우...민둥산  (0) 2008.08.25

우리들의 우산

   

                           김종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빗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리들 우산 안에 들어와 있다
잠시 접혀있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우산을 펴면
우산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젖지 않기
외로움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서로 젖지 않기
물결 위로 혹은 꿈 위로 얕게 튀어오르는
빗방울 같은 우리 시대의 사랑법 같은
우산을 받쳐 들고
비오는 날 우산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비는 내려서 우리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로 흘러가지만
정작 젖는 것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
젖지 않는 꿈, 젖지 않는 희망을
누가 간직하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물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산만큼 작아져서 정답다
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 있는 한
한번도 꺼내 쓰지 않은
하늘 같은 우산 하나
누구에게나 있다

...........................................................

가을비 주룩주룩 내리는 9월 첫날 아침,
금세 가을이 다가서버려 괜히 마음 허전한 날,

 

김종해 님의 시를 읽고 나니
내리는 빗방울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비에 젖은 우산 툴툴 털고 들어서면
나와 함께 따뜻한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찻집 한 구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마음이 서둡니다.

 

우리 가슴속에 사랑이 남아 있는 한,
그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한,
하늘같은 우산 하나 간직하고 있으니
더욱 마음 든든해 집니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란...악기 사러 가는 길  (0) 2008.09.16
김종목...기다림  (0) 2008.09.09
김재진...너를 만나고 싶다  (0) 2008.08.29
김선우...민둥산  (0) 2008.08.25
김소월... 가는 길, 맘 캥기는 날  (0) 2008.08.19

너를 만나고 싶다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서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서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생의 행운일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 마주치기 어려워서이고,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게 어려워서일 것입니다.

욕심이겠지요?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것.
거짓이겠지요? 송두리째 이해한다는 것.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종목...기다림  (0) 2008.09.09
김종해...우리들의 우산  (0) 2008.09.01
김선우...민둥산  (0) 2008.08.25
김소월... 가는 길, 맘 캥기는 날  (0) 2008.08.19
고창환...선인장  (0) 2008.08.14

 민둥산

 

                                 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그녀의 감각적인 시어를 따라잡으려면
늘 한 번씩 다시 되새김질 해 곱씹어야 한다.
한 번 훑고 지나가서는 아랫도리만 부풀어 오를 뿐
그 감각을 제대로 깨우지 못한다.

 

한 번은 시작이라서 짧고 강하게...
두 번째 쯤에 제대로 힘을 써 볼 요량이라면
한마디 한마디 끊어보아야 한다.

서서히, 찬찬히, 세심히, 가만히 가만히 살펴야 한다.

 

오늘 그녀를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마주해 봐야겠다...

 

잠시 덮은 눈거풀 위에 민둥산 새하얗게 펼쳐진 억새밭이 아릿하다.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맘 캥기는 날


                         김소월


오실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아도
맘 캥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재진...너를 만나고 싶다  (0) 2008.08.29
김선우...민둥산  (0) 2008.08.25
고창환...선인장  (0) 2008.08.14
이외수... 그토록 매운탕이 먹고 싶으냐  (0) 2008.08.11
서정윤... 편지  (0) 2008.08.11

  선인장

 

                                        고창환


선인장이 사막 식물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선인장이 또한 목마른 식물이란 것은 아무도 모른다.
목마른 것들은 모두 거칠어진다.
내심 감춰둔 열망이 깊을수록 온몸의 가시는 무성해지는 법
마른 목구멍의 갈라지는 틈새는 뜨거웠던 세월의 흔적인 것이다
기실 모래바람 자욱한 세월 속에선 속으로 키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인장이 붉은 꽃잎을 피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갈증을 참아야 하는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 향기가 세상을 진동하려면 몇백 번의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하는지.

.......................................................................................

 

요즘 베이징에서 피와 땀을 쏟으며 각 종목에서

올림픽 경기를 치르는 젊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적어도 그들의 모습에서 한가지 진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도전정신과 열정과 패기가 너무 아름답다는 것,

그들이 그 순간을 위해서 쏟아낸 땀과 눈물과 노력이

감동, 그 자체임을...

 

어쩌면 저것이 삶의 의미임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