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쇠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끊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벼텨온 것은
그 위로 밟고 자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짖누르는
답답한 것이였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찿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 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 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방면으로 그리고 수원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 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치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 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을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자욱이 된다.
.................................................................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시간이...

 

내 곁을 휙하니 스치고 지나가고선

바람처럼 자취없이 사라져 버려

지금 이곳엔,

고요와 침묵, 그리고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계속

이 길을 따라 걷고 있었구나.

 

내가 이 길을 걷고 있었던 것조차 모른채로

마냥 걷고만 있었구나.

 

주변조차 제대로 돌아볼 새도 없이

그냥 계속 걸어왔구나.

 

그저 그렇게 스쳐갔던 이,

새로 만났던 이,

헤어졌던 이의 이름도,

얼굴도,

간혹 맞잡았던 손의 온기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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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幸福)


                        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 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 두는


바위틈새 같은 데에
나뭇구멍 같은 데에


행복(幸福)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

 

언젠가 들었던 우화같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기 위해
인간에게서 행복을 빼앗아야만 했던 사탄들...


그들이 찾아낸 바로 그 곳!

어리석은 인간들은 영원히 절대 찾아내지 못할
행복을 꼭꼭 숨겨둘 은밀한 장소


바로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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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음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들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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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 ―― 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 ―― 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 ―― 매 단풍 들것네"

 

 .............................................................

가을이 이미 이렇게 깊은 줄도 모르고
달력이 이제 겨우 한 장 더 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매년 오는 가을이 올해는 유난히 참 많이 깊었다.

내 얼굴도 그리고 내 마음도 참 많이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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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오면 빗 길을 걸어라.
갈대숲에 검은 가슴 도요새도 너를 보고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무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을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거리에 인적도 드물어진 시간,
가슴이 먹먹해져 밖으로 나왔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그 비를 다 맞고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으며, 또 얼마나 걸어야 할까...
어디까지 가야하며, 왜 걷고 있는가...


울지마라...

그래, 외로우니까 사람이지.
사람이니까 외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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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박제영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 볼 일이다.

..............................................................

어디론가 문득 떠나고 싶은 날씨
적당히 밝고 또 적당히 흐린...


차츰 제 잎 덜어내는 나뭇가지도
그렇게 길가에 흩어진 낙엽들도
적당히 어수선하고 또 적당히 아름다운...


여러가지로 어지러운 내 마음도
혼자이지만 따뜻한 차 한잔 마주하고 앉은 이 자리도
적당히 쓸쓸하고 또 적당히 온화한...


이제 한 번 정리해봐야겠다.


올해가 어떠했는지...
내가 어땠는지...
우리가 어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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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차


                       이해인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오래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닐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차를 마시는 것은 


사랑을 마시는 것.
기쁨을 마시는 것,
기다림을 마시는 것이라고 


다시 이야기 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는
고마운 행복이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우리의 가슴 속에선
어느날 혼을 흔드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 올테지요?

 


........................................................................

정말 눈 깜빡하는 사이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싶었는데,

가을이 이렇게 깊었는 줄 몰랐는데,

급작스레 서늘해진 날씨덕에
따뜻한 한 잔의 차가 생각납니다.

은은한 향과 찻잔으로 전해오는 따뜻한 기운이 그리워집니다...

차 한 잔의 여유,
차 한 잔의 기다림,
차 한 잔의 그리움...

오늘 저랑 따뜻한 차 한 잔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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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배 접어


                             박남준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이고 천날 흰 종이배 접어 띄우면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먼 바람결로도 꿈결로도 오지 않는
아득한 당신의 그 바다에 닿을까요


그리움의 종이배 접어
백날 삼백예순다섯날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바람 같은 당신께로 가는 사랑
흰 종이배 접어 띄워요

......................................................................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날마다 고이고이 접어

종이학 천 마리를 유리상자에 하나 가득 담았다.

그 속엔 온갖 사연들이 접혀 있어

일일이 다 얘기할 수가 없다.

종이배를 그리움 가득 담아 접고,

강물에 띄우는 것은

어쩌면 내 마음을 접어두는 일...

꿈결로도 오지 않는 당신을 접어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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