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쉬었다 가라
언젠가는 멈추어 서야할 때가 오리니
가끔은 발걸음 멈추고
잠시나마 숨 돌리고
하늘도 올려 보고
땅 바닥도 훑어보고...

 
천천히 가라.
언젠가는 끝이 날 여행이니
조금 천천히 간다고
딱히 서러울 것도 없고
어차피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니
쓸쓸할 것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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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생각


                      권기택

 

오늘도
고모님께서 말씀하신다
널 얼마나 이뻐했는지 모른다고

 
난 아무 기억이 없다


언제부턴가
나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널 얼마나 귀여워 했는지 모른다고

 
조카녀석도 기억이 없다

...............................................................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인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고
아마도 그게 옳을 것이다...


이해하려 하지말고
그대로를 인정하는 게...


이해시키려 하지말고
그냥 배려하는 게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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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고 노래하는,
'인생이 술 한잔 사주지 않는다' 고 투덜대는 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늘이 있고, 눈물이 있어야 한단다.
눈물없는 사랑이 없고, 그늘이 있어야 넉넉함이 있단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준 일이 있는가?
내 사랑을 넉넉히 안아준 일이 있는가


반성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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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

늦은 밤,
집으로 가는 언덕을 비척비척 올라가다

언덕 마루 너머

하늘 가운데 쾅! 박혀있는

반달과 눈이 마주쳤다.


달이 언제부터 저 자리에 걸려 있었을까?


달이 무척 가깝게 보이고,

입가에 살짝 스친 미소가 막 지나친 뒷 골목으로

사사삭 자취를 감춘다.

 

파아란 바람이
땀이 살짝 밴 등짝을 민다.
아무것도 못 걸친 팔뚝에 얇은 소름이 돋는다.


얼른 들어가야하는데,

오늘은 유난히
땅바닥이 조금씩 흔들리고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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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이병기 시/ 이수인 곡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고사리같은 두 손 배꼽 아래 꼭 맞잡고

참새 주둥이 놀리듯 재잘재잘 이 노래를 불러대는

한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늘 이 노래와 '비목' 을 불러보라 했었다.

나도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척 좋았다.

지금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게

적어도 40년 가까이 되었다.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불렀을까?

이 노래를 언제 불렀던가?

 

밤 하늘의 별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생각해 보니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참으로 사랑스런 시(詩)다.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다.

저 하늘의 별빛처럼 아득히 멀어지는 옛 이야기이다.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

애들 키우다보면 열 댓번은 족히 겪었던 일이지...

사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 사는 게 다 그렇지...

 

왜 그러냐고,
왜 참냐고,
왜 사냐고...


하루에도 열 두번씩
쓸데없이 쏟아내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


고단한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괜한 생각들
괜한 말들......


사실...
이유는 없지만...
우리 사는 거...
괜찮은데...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자면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래, 사랑을 하기 위해 살자.


그래도 외로울 때,
마음에게 편지 한 장 적어 보자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천천히
기다리다 마음을 접고,
바라보다 눈을 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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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김재진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허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불과 며칠 새, 밤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어젯밤에 친구와 늦은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지요.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 무엇보다 편안하고 즐거워야할 -
조차 즐기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별 것도 아닌 주변 잡다한 이야기들과
아무 것도 아닌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이제 내 생에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이 소중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마주 앉아 이렇게 술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날이,
지난 일 얘기 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바라만봐도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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