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어제도 무척이나 속이 상해
이것 저것 별의 별 생각 다 하다가
늦은 밤까지 소주 한 잔으로 속을 달랬다.


사는 게 다 그렇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가을이 깊었는지...
저 편 강둑길에 갈대꽃이 하얗게 줄줄이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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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황금찬

 

지금 이 간이역에
머무르고 있는
완행열차의 출발 시각이
임박해오고 있다.


출발 시각을 앞에 두고
언제부턴가
화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간이역에 머물렀던
열차들은
한결같이 어제의 구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차가 떠나고 나면
모든 것들은
또 그렇게 구름이나
강물로 흘러가고 만다.


갈매기의
긴 날개가
하늘 가득히
펄럭이고 있다.


어느 역을 향해
지금 기차는
또 출발하는 것이다.


그 역의 이름을
누가 알고 있을까?

.......................................................

영겁의 세월 속에서
지금 우리의 삶은 의미없을만큼 작다.
모든 것은 구름이나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고, 멀어지고, 사라진다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은
가는 순서도 없고,
기다리는 일도 없으며,
이별의 시간, 출발의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그 시간이 임박해오고,
조금씩 흔들릴 뿐...


천만다행으로 가까워오는 시간을 우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나버린 그 간이역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고,
지나가버린 그 시간 또한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신의 선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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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강영은


오늘처럼 한 남자가 피어나는 건
구름이 제 먼저 와 담장 위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담쟁이 넝쿨이 자꾸 손을 뻗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한 남자를 적시고 싶은 건
하늘이 제 먼저 와 호수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그렁한 물빛이 자꾸 깊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한 남자 곁에 눕고 싶은 건
햇살이 제 먼저 와 이불을 펴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후박나무 너른 등이 자꾸 얇아지기 때문이다

..................................................................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계절은 그렇게 찾아오고
다시 지나가고...

 

사랑도 그렇게 다가오고
다시 멀어지고...

 

지금도 가을은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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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가족


                              이상국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

아, 날개없는 것들의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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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물장수

 

                             김동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꺽삐꺽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

* 1938년 '신세기'에 발표된 민요조의 시로 '산너머 남촌에는'을 쓰신 김동환 시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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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여관

  

                                             심재휘


나는 떠날 때부터 이 강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마지막 단추를 꿰며 닥쳐올 산책과 해안도로 너머의 일몰을 예감하듯 그 곳으로 떠나는 우리의 여행은 지나치게 즐거웠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어느 생애와 눈을 떠도 감아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또 다른 생애만 있을 뿐이었구요. 나는 그곳의 달빛 속에 당신을 몰래 버리고 왔습니다.


나는 이 강의 어느 먼 기슭쯤에 살며 오늘도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혹은 밀려나갈 때처럼 무수히 나를 용서하세요. 내가 천천히 흘러 강 하구에 이르더라도 다시 그 섬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달빛에 떠도는 섬 하나는 되겠습니다. 강화도 바닷가의 어느 바람 부는 여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대를 생각하겠습니다. 그곳에는 세상의 모든 이별들이 다 모여든다지요. 그곳의 달빛은 너무 밝아 슬프다지요.

................................................................................................................................................

한 편의 시가, CF 나 뮤직비디오 같고, 어떤 영화보다도 강렬하다.
문학에서 시가 가장 정제되고 압축된 언어가 사용되기에

나도 언젠가는 시로 쓴 소설을 한 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심재휘의 '강화도 여관' 은

가슴시리면서도 멋진,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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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리를 걸어서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로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와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풍성한 한가위 명절,
꽤 오래 전,
한적한 산골 마을의 추석 풍경이
하늘거리는 한지 한 장에 옮겨지듯
소로시 보얗게 번지며 펼쳐진다.

이십리를 걸어서 장에 나가 추석을 차릴 제수를 준비하는 

정성스런 마음도 전해진다.


아직 덜 저문 하늘에 구름이 한가한 걸 보니,
오늘은 둥그런 달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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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곡(小曲)

 

                        추은희

 

올 가을은

음악을 듣고

다음은

사랑을 할까

 

우유빛 새벽 하늘

장미빛 석양이면

가슴이 뛴다.

 

심지불 돋우인

비 오는 밤은

도란도란

연인들의 이야기

 

발갛게

빈 마음이사

꿈으로 엮을까

 

해묵은 역사는

낡은 일력으로

그만이고......

 

올 가을은

음악을 듣고

그 다음

사랑을 할까

 

그 사람의 미소속에

그 사람의 꿈결속에

뛰어 들어가 볼까

올 가을은......

......................................................................

오랫만에 온 식구가 모여 북적거린다.

역시 오래간만에 찾아온 번거로움이라 반갑다.

엄마의 책장 앞을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책들이 나란히 꽂혀있는 게

신기하게도 한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몇 권의 시집을 꺼내들고는 펴 본다.

박정만 시집, 윤동주 시집, 이육사 시집, 조병화 시집, 이해인 시집, 허영자 시집...

한 장 한 장 접혔던 책장 속의 추억이

오롯이 펼쳐진다.

 

지금 ...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 를 들으면서

'소곡' 시 한 편을 읽고

그리운 이름에게 문자라도 한 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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