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서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꽃 앞에

오랜 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 되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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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시편


                              박기섭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

이제 보니 2011년도 보름정도 남았다.
한 번 정리해 볼 때가 된 듯하다.


점점 가속을 더 해가는 세월,
참,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가지...


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급작스럽게 추워진 어느 날,
따뜻한 차 한 잔이 더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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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박건한


빈 곳을 채우는 바람처럼
그대 소리도 없이
내 마음 빈 곳에 들어앉아
나뭇잎 흔들리듯
나를 부들부들 떨게 하고 있나니.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아니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어둠처럼
그대 소리도 없이
내 마음 빈 곳에 들어앉아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게
나를 뒤척이고 있나니.

..........................................................

 

그리움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흔들림을...
이런 뒤척임을...


마음의 빈 곳
공허


혹은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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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언제나...
내가 서있는 자리를 알려주는 건
낙엽 그리고 서늘한 가을 바람...


아주 오래 전 우리들의 얘기는
정겨운 기타 선율에 아련히 실려
어렴풋이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한 켠이 묵직해진 가슴,
심장 소리도 들릴 듯 말 듯...
오늘은 눈이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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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자꾸 따라와요

 

                             이상국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리 밟으며 쇠똥냄

새 구수한 판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

엇그제 할아버지 제사를 모셨다.
내가 태어나기전 돌아가신 당신의 제사를

한 삼분의 일은 내 아버지와,
그리고 나머지 삼분의 이는 내 어머니와 함께 모셨다.

그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큰 딸 (내게는 고모님이 된다) 이

이제는 다소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마다않고 오신단다.
그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한 편으론 부담스럽고
또 한 편으론 서운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론 안스럽다.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이제는 너무나 노쇠한 모습,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너무나 닮은 고모님을 뵙고는
제사 지내는 밤내내,
며칠 밤을 뒤척이며 무수히 되뇌던 말들을
서둘러 돌아서는 고모님 뒷모습에 흐릿하게 딸려 보내고 말았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차고, 달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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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오랜만에 연탄재 쌓인 광경이 눈에 들어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셔터를 눌렀다.

바람이 차가와졌다 싶으면, 가끔 한 번씩

안도현 시인의 한마디가 매섭게 뒤통수를 후리고 지나간다.

 

'너는... 누구에게 단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혼잣말로 궁시렁거린다.

'나는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빈집

                  이상교


할머니, 아기, 장롱, 항아리
강아지 집
다 데리고, 가지고
이사를 가면서
집은 그냥 두고 가더란다.


오막살이여도 내 집이어서
제일 좋은 우리 집이라고
자랑삼을 땐 언제이고,


다락, 툇마루, 문지방
댓돌이 울더란다.
미닫이문이야 속으로 울었겠지.
이사 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대문은 서운해서
열려 있는 그대로더란다.


그래서 말인데 얘들아,
우리 모두 함께 살러 가자,
안마당, 부엌 아궁이 앞, 지붕 위도 좋아.
툇마루 밑도 괜찮아.


들깨야, 엉컹퀴야, 도깨비바늘아,
우리가 살러 가자.
대신 살러 가자.

..................................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손택수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먼지 1%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제게도 저작권을 묻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작가의 저작권은 물론이고 출판사의 출판권까지 낼 용의가 있다고도 합니다 시를 가지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한 어느 방송국 피디는 대놓고 사용료 흥정을 하기까지 했답니다 그때 제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불로소득이라도 생긴 양 한참을 달떠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참 염치가 없습니다 사실 제 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나무와 새인데 그들에게 저는 한 번도 출연료를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마땅히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 구름과 바람과 노을의 동의를 한 번도 구한 적 없이 매번 제 이름으로 뻔뻔스럽게 책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작자미상인 풀과 수많은 무명씨인 풀벌레들의 노래들을 받아쓰면서 초청 강의도 다니고 시 낭송 같은 데도 빠지지 않고 다닙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집 계약서를 쓰러가는 날 악덕 기업주마냥 실컷 착취한 말들을 원고 속에 가두고 오랫동안 나를 먹여 살린 달과 강물 대신 사인을 합니다 표절에 관한 대목을 읽다 뜨끔해하면서도 초판은 몇 부나 찍을 건가요, 묻는 걸 잊지 않습니다 알량한 인세를 챙기기 위해 은행 계좌번호를 꾸욱 꾹 눌러 적으면서 말입니다

.....................................................................................

우리들의 숨가쁜 일상에서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일이


잠시 마음의 한숨을 돌리는 일이길,
잠시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순간이길,
미소 한 번 머금는 시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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