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꽃을 보면서


                      박재삼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

라일락 향기는 무척이나 진하고 향그러웠다.
고마운 봄의 향취
그 진한 여운은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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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아무래도 잦아졌다.


만나는 것은 갈수록 어렵고,
헤어짐에도 많이 무뎌졌다.


소중하지 않았던 만남이 있었던가?
또 어떤 헤어짐이 그리 사소하였던가?


그 많던 꽃
다 지고,
초록 세상이 되는데,
겨우 보름 남짓 걸렸다.


이 초록은 얼마나 호사를 누리려는지...

오늘은 그 흔하던 꽃 잎을 눈씻고 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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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옛집에 가다


                     이상국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며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선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리 가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 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

이제 봄인가 했더니,
잠깐 꽃 잔치 훌쩍 지나고
금세 어린이 날도 지나고,
어버이 날도 지나고,
우리 아버지 제삿날도 지났다.


한밤중, 제사상 다 치우고
누나네, 동생네 다 보내고
혼자 거실에 남았다.


상에 올렸던 술을 병에 채우며,
아마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거라고
허공에 말을 건냈다.


봄 비가 오시는 지,
후두둑 후둑 후둑
티디딕 티딕 티딕
창 밖이 흐려진다.


금세 술 잔도 다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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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게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내게 살아야 할 오늘이 주어졌다.
늘 감사하긴 참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내게 주어진 하루가
맑은 공기가
반가운 햇살이
모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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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임길택


마루 끝에 서서
한 손 기둥을 잡고
떨어지는 처마 물에
손을 내밀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처마 물이 떨어질 때마다
톡 탁 톡 탁
손바닥에서 퍼져 나갔다.

 
물방울들 무게
온몸으로 전해졌다.

 
손바닥 안이
간지러웠다.

....................................................

 

봄 비...
제법 오래 그리고 많이 내린다.


이제 이 비가 물러가면 부쩍 더워질게다.
이제껏 그래왔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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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향기


                     장지현

 

꽃 진 자리
사랑의 열매를 맺듯이
아픔없이 이룰 사랑이 있어라


긴 세월 기다림의 꽃망울
따스한 햇살
기다리는 추억의 빛바램이어라


하얀 기다림에
꽃눈은 눈꺼플 깜박이듯
깊은 상념에 빠져 흐름을 찿아본다


바람은 묻지 않아도
때를 알아 흔들어 주듯이


그 사랑꽃
피우기 위해 만남의 길은 멀어도


살포시 고개 숙인 등 결에
하얀 그리움이 내려 앉아 찾았던
사랑을 나눌 순간포착에 맺히는 너를 ! 
...............................................................................

 

만남의 길이 멀고 멀 듯,

함께 걷는 길도 그러하다.
첫 만남의 그 생생했던 기억이 빛바랠 즈음,
앞서 걷는 네 어깨에 가만히 얹히는

꽃 잎 한 장.


묻지 않아도 모두 알고,
말하지 않아도 모두 열어주는
마음의 문이 어디 있을까?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려

피운 꽃
그 꽃이 지고 있다.


꽃 피는 시간이 일년이면 몇 날이나 될까?
우리 삶도 그렇게 짧디 짧은 순간을

마음 다 하여 사랑하면 그만인 것을.
내년에 다시 필 약속을 믿고
또 기다리고 기다려야 함이 숙명인 것을.


기다림이 어찌 달고 맛있으랴.
그 사랑 꽃 한 송이 피워보자고
멀고 먼 길을

돌아 돌아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기다린 시간이 얼마인데.

 

그 마음이 얼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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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정영애


사랑을 한 적 있었네 
수세기 전에 일어났던 연애가 부활되었네
꽃이 지듯 나를 버릴 결심을 
그때 했네 
모자란 나이를 이어가며 
서둘러 늙고 싶었네 
사랑은 황폐했지만 
죄 짓는 스무 살은 아름다웠네 
자주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곤 했었네 
활활 불 지르고 싶었네 
나를 엎지르고 싶었네 
불쏘시개로 희박해져가는 이름 
일으켜 세우고 싶었네 
그을린 머리채로 맹세하고 싶었네 


나이를 먹지 않는 그리움이 
지루한 생에 그림을 그리네 
기억은 핏줄처럼 돌아 
길 밖에 있는 스무 살, 아직 풋풋하네 
길어진 나이를 끊어내며 
청년처럼 걸어가면 
다시 


필사적인 사랑이 시작될까 두근거리네 
습지 속 억새처럼 
우리 끝내 늙지 못하네
..............................................................

'영혼이 깃든 청춘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는 카로사의 말처럼,


우리는 끝내 늙지 못한다.
가슴에 사랑이 있는 한.

서시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다소 외지고
좁다란 길이라도 괜찮다.
내게 남은 길이
번잡스럽거나
소란스럽지 않았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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