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시간이 흐르면 변해가는 것.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언제까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까?


우리 더 자라지 못한 지 이미 오래,
혹시 더 깊어지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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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항상 그랬다.
늘 마음만 서둘러
아직 멀리있는 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마음만 벌써
봄 너머로 가서는
봄이 오질 않는다고 또 보챈다.

............................................

봄을 노래한 수많은 시 중에서
이 시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아직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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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복

 

잠든 잎새들을 가만히 흔들어봅니다 처음 당신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날처럼 깨어난 잎새들은 다시 잠들고 싶어합니다 나도 잎새들을 따라 잠들고 싶습니다 잎새들의 잠 속에서 지친 당신의 날개를 가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깃을 치며 날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겠지요 처음 당신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날처럼 잎새들은 몹시 떨리겠지요
..................................................................................................

잠시
시 한 편을 읽는 일이
네게 위안이 되길...


그리고 잠시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일이
네게 평안이 되길...


내 바라는 것
그것 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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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편지  
 

                          김명은


그대에게 나에게
오가지 못한 말
부딪치지 못한 눈빛
저 달이 머금었다 했습니다


먹구름 가득 낀 날
그믐밤은 어쩌라고
슬픔의 진주
희망을 잡은 듯 하셔요


자다 깬 달콤한 꿈
다시 누우면 그 꿈 아득하여
아쉬움 남는 일
겨울날 바람꽃 만큼입니다


달빛 비추는 세상에는
단 한사람 때문에 잠들지 못한
애처로운 가슴 하도 많아


하얀 입김이 끌고 다니던
나의 어둔 그림자
그대 밟는 새벽길
차가운 이슬로 내려앉았습니다

...................................................................

오늘 새벽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았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다.
다시 꽁꽁 싸맨 걸음 걸음...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건,
바싹 마른 나뭇가지 속에 움이 그렇고,
살짝 들 뜬 땅속에 새싹이 그렇고,
매서운 독기가 좀 가신 새벽 바람이 그렇다.


오랜 기다림의 싹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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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잊어

                  김소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떠면 생각이 떠지나요?"
...................................................

울 엄마도 좋아하던 소월의 시...
나도 좋아하던 그의 노래...


처음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노래 하고 싶었다.


지금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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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최승헌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낯선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이 거리에 꽃이 피자 근심을 피우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꽃이 피어도 꽃향기와 함께 행방불명되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 아무 것도 잉태할 수 없는 불임의 하루가 저물면 종일 컴퓨터 속에서 신속하고 튼튼한 정보를 사냥하는 셀러리맨이나, 두 바퀴에 매달려 방부제 뿌려진 세상을 질주하는 퀵서비스맨이나, 개업한지 며칠이 지나도 손님 구경 힘들어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는 닭발집 주인남자나, 발광하던 네온사인이 현란한 춤을 멈출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서성거리는 대리운전기사들이나,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길들여 왔던 허약한 언어로는 한 끼의 밥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늘 밥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비열한 언어들이 자라 숲을 이룬 이 거리에 빌붙기 위해 허겁지겁 살아온 세월만큼 숙성되어진 시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바닥을 닦고 다닌 삶의 걸레가 채 마르기 전 익숙했던 생업의 자리에서 나가떨어져 졸지에 그놈의 밥통을 잃어버린다한들 요동도 안칠 심장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 무엇이던 재빨리 체감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존은 비대해지고 몸은 축나는 것이 이 거리의 기본수칙이다.

..............................................................................

한 젊은 극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이 세간의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사실 더 안타까운 것은 화제의 촛점이 그녀의 극적인(?) 비참한 죽음이었다는 것.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사건에 대한 생각의 정리가 돼, 더이상 가십거리가 되지 않으니 조용히 덮혀버리고 말았지만...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후, 가장 많은 활자를 소비하는 이 시대,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고, 정보의 홍수 속에, 좀 되먹은 정보를 찾기란 오히려 만만치않다.
목적은 오로지 소비(消費) - <경제>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재화를 소모하는 일 -
감히 그 속에서 창작이라니... 흠...


촛점이 흐려진 정치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우리들...
오늘 하루를 왜, 살고 있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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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풍경 2

 

                   천양희


헐벗은 나무
둥지튼 새들은 떠나갔다
허둥대는 바람같이
떠도는 마음 하나 못 붙들고
삶은 종종 살얼음판이었다
나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같이 살면서 혼자 일어서야 하고
사람들은 어째서
낯선 거리 떠돌며
돌아가려 하는지
봄은 아직 멀었는데
기다렸다 기다렸다 기다렸다
눈보라 헤치며 어느 날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사는 동안
단 한순간도 허투루 흐른 시간이 있었던가?
단 한 사람도 허튼 만남이 있었던가?


그리 만든 건
사실...
 
고스란히
내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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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선우


골목길 돌아 나오다 누가 나를 불러
잠시 눈길 준 폐타이어 쌓인 창고 앞
조붓한 담장 아래 아기 어금니처럼 돋아 있는
귤싹 하나 만난다 지난 겨울 어느 늦은 밤
소주를 사러 점방 가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낸
귤씨 하나가, 아니겠지 설마 그 귤씨 하나가


큰맘 먹고 사놓은 백개들이 귤 한상자
한겨울 밤 야금야금 까먹던 그 귤들이
더러는 맑은 오줌으로 몸 밖을 흘러나가고
사는 일이 서리 앉은 빨랫줄 같아,
푸념하면서도 하루를 견디게 한 어떤 열량이 되고
잔주름 생기기 시작한 눈가
지친 세포의 자살을 지연시키는 비타민이 되고
어두운 상자 속에 얼마 남지 않은 귤 몇알이
그래도 천연스럽게 댕글댕글 빛나던 힘!


귤껍질에 빼곡히 열린 구멍이란 게 실은
저의 중심을 향해 세상의 향기를 흐르게 한 통로는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몸을 맞대고
껍질을 벗겨내도 흩어지지 않던 귤조각
시고 달고 아린 저마다 다른 맛들이
열어둔 통로를 지나 중심으로 모이듯
귤 한상자 놓여 있던 겨울의 귀퉁이가 문득 밝아지고
알전구같이 흐릿한 창밖의 그늘이
외로운 귤알들로 빚어지곤 했던 것이다

........................................................................................

처음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쑥스러운 웃음과 더불어
불쑥 내게 내밀던
오렌지빛 귤향수


그 고운 빛깔의 향수보다
그 달콤한 향보다
먼저 눈에 띈 건
사실...
누나의 낡은 손이었지.


한순간도 어긋남이 없이 찾아오는 계절이
40여년을 늘 어색하기만 했는데,


오늘 누나의 잔주름 가득한
세월의 눅은 때가 골골이 낀 손에
들려진 귤 향수 병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어찌나 시리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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