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

 

                        박철


아빠는 마음이 가난하여 평생 가난하였다
눈이 맑은 아이들아
너희는 마음이 부자니 부자다
엄마도 마음이 따뜻하니 부자다
넷 중에 셋이 부자니
우린 부자다
.......................................................

먹고 사는 게... 참, 만만치 않다.


연평도 포격 후, 곧 북한과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연일 군사관련 보도가 몇 달내내 뉴스 첫머리를 장식했다.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소, 돼지를 죽여 파묻었다.,


대기업은 연일 사상 최고실적 발표를 쏟아내고,
주식시장은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물가는 끝없이 올라, 서민의 주머니 사정은 점점 나빠지고,
전세대란으로 편히 살 집조차 얻기가 어렵다.


아이가 묻는다.
왜 이사를 가야하냐고...


전셋돈을 너무 많이 올려달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뒤로 감추었던 손을 펴보인다.
만원짜리 한장과 동전 한움큼...


이거 말고도 좀 더 있으니 보태서 이사 안가면 안되냐고...
울컥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 대답을 못하고 얼른 돌아섰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아빠 회사가 너무 멀어서 그런거라고...
아빠가 얼마나 부잔지 모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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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속의 방


                       강신애


대흥동 가파른 계단 끝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걸린 방
알고보니 시든 종이꽃이었다


키 작은 주인 여자가 방문을 열자
잡다한 생활의 때가 모자이크 된 벽지와
싱크대의 퀴퀴한 냄새


비좁은 복도를 마주하고 세든 세 가구가
공동 화장실을 가다 마주치면
서로 스며야 한다


하루치의 숨을 부려놓고
햇빛 한 줄기에도
보증금이 필요한 세상


모든 희망의 문짝이 떨어져나간 대문을
허둥지둥 나서니
거리의 그 많은 사람들 모두 방이 있다니!


아니야, 방은
액자 그림 속에나 있는 것
노숙. 가망없음.
그게 우리 지상의 방이야


생활정보지를 펼쳐 아홉번째 X표를 그리면서
방 한 칸 얻기 위해 걸어다닌
일생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목 부러진 해바라기들이
투둑 발에 밟힌다
.............................................................................................

지난 주 내내 전셋집 구하러 분주했다.
다행히 주말에 계약서를 쓰고 나니,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온다.

 

설 전전날 갑작스레 6천만원이나 전셋값을 올려달라는 통보에
살 집(?!!) 을 알아봐야하는 형편(?)에 놓이게 되니,
돈 없는 것도, 엉덩이 붙이고 편히 살 집 없는 것도 서글프다.

 

멀리 김포까지 가서 집을 구했다.
이사도 해야하고, 아이들 전학도 시켜야 하고,
짐도 정리해야 하고, 돈도 구해야 한다.

 

아, 사는게 왜 이리 번거로운지...

사뭇 그리고 어렴풋

 

                                  이상교

 

잠깐, 동네 한 바퀴를
가볍게 돌고 오겠다던 당신은
한 시간 남짓이도록 돌아오지 않고,
어딜 향해
당신을 찾아나서야 할 것인가.  
눈 녹는 어스름 겨울 저녁 까마귀보다
더 깊고 음울한 눈을 하고서. 


마침내 어둠 저편을 뚫고 들려온 당신의
외마디 부름 소리
여보세요...
내 목소리 여전히 당신 귀 앞에 생생하고
내 귓가에서는 흐릿하게 사라지려 하는
지우개로 지워지기 직전의
당신 숨차하는 목소리,
잘 안들려요! 다시 전화하세요!    


어느 날, 문득, 저녁, 혹시라도 당신이 ,
자리를 비우고 말았을 적,
나의 두 귀 맡에 幻聽이듯 
여보세요....여보세요....
당신 목소리 바람으로 닿았다 흩어질지 몰라. 


작정하고 찾아 나서기로 한 그때부터
내 두 눈엔 아무 것도 들지 않아.
당신 패인 두 볼 한번이라도 착실히
아프게 눈여기려면.
......................................................................................

요즘들어 확실히 만남보다 이별이 잦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헤어짐은 우리가 어쩔수 없는,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


하지만 남겨진 자...
잊어야만 하는 숙제가 남겨지고,
돌아서 가려해도 멀리가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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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빛이 싫여 달빛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빛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휠훨휠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위어이 위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에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이 시를 한 줄 한 줄 읽다보니,
소싯적 가수 조하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신묘년 새해 첫 출근길, 자유로에는 안개가 가득 내려앉았다.


전세금을 터무니없이 올려 달라는 통에 집을 옮겨야하는데,
전세대란이라더니 연락처를 준 부동산들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그래, 아무래도 나는 좋아라 ...^.^...

팔원(八院) -서행 시초(西行詩抄) 3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 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 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 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애월(涯月)에서


                                   이대흠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옴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
용서할 수 없는 이에 대한 연민...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서글픔...


창문에 오롯이 매달린 물방울이
손 닿는 순간 주루룩 흘러내린다.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


                                            고재종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
탱자울에 방자한 참새떼 소리
이제 그만 시끄럽다 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 몇몇
죄다 비닐하우스에 가버리면
하느님도 간간 바람으로 스쳐와선
후진 곳에 쓰레기 버리듯
은행나무 잎새를 우수수 쏟아버리게 한다
외로움은 빛나서 별이 되지 못하고
청대숲의 청대잎들
저희들끼리 몸을 버히게 하고
까짓것 알몸으로 알몸으로 온통 덤벼도
어느 손목뎅이 하나 건드리지 않는 홍시들
이제 그만 붉은 눈물 떨구게 한다
외로움은 질기고 질겨서
그래도 남은 무엇이 있다는 듯
삼밭의 폭배추를 포탄이 되게 하고
여차하면 날아버릴 듯 응등거리게 하고
더는 반짝반짝 닦아내지 않는
장독대의 옹기들을 온통 검푸르게
간이 들게 하고, 간이 들어
미륵불처럼 처연하게 하고
반갑다, 어디서 개 한마리 짖는 소리에
마을 가득한 햇살만 출렁! 하게 한다
아아 외로움은 흘러서 강이 되지 못하고
봉두난발 갈대꽃만 미쳐 흔들고
강둑의 미루나무 끝으로나 달아나서는
이제는 외로움 저도 외로워
우듬지 한 떨림으로 청천하늘 치받는다
.....................................................................................

 

겨울 강가에서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

우리는 세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 하나는 사색이다. 이것은 가장 고상한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모방이다. 이것은 가장 쉬운 길이다.
그리고 셋째는 경험이다. 이것은 가장 쓰라린 길이다.

 - 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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