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에서 띄운 배


                        박남준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긏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요


흘러가겠지요
이미 저는 잊혀진 게지요
아 저의 발길은 내일도
배를 띄운 강가로 이어질 것이어요
............................................................

그렇게 강물은
시간은
추억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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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오인태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을 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 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은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

땀과 눈물
흙과 바람
열정과 정염
인내와 고독
그리고 기다림, 또 기다림


어느 꽃이라고 그냥 뜻 없이 피겠는가?
어느 누구의 사랑이 그냥 이루어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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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女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눈물 마를 때 까지 흘려도 좋으련
하지만 이제는 더 울지 마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너 저무는 날까지 지켜준다 약속하련
행여 내가 먼저 이 세상 떠나더라도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니
아프지 마라, 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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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風葬)


                이상국

 

오랫동안 수고했다
돌쩌귀에 겨우 매달린 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집


저 무너진 아궁이가
우리들 몇대의 밥을 지었다면
누가 믿겠니


새끼내이 잘하던 소는
늙어 무엇이 되었을까
그 많던 제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차일 높이 치고 잔치국수 말아내던 마당에 들어서며
너븐들 쇠장사하던 아무개네 집 아니냐고 아는 체하면
집은 벽을 허물며 운다

..............................................................

지난 주말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모두들 분주한데, 조용히 어머니가 날 방으로 부르신다.
내년부터 시어머니 제사와 함께 지내자고, 내가 45년을 모셨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신다.


그러마 대답하곤 방에서 나와 가만히 생각을 했다.
일면식도 없었던 시아버지의 제사를 시집 온 후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냈고,
남편도 없이 자식들 키우며 오랜 세월을 모셨으니, 그만할 법도 하다 싶어 생각을 접었다.


그날 밤, 제사를 모시는 내내, 구석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끝도 없이 눈물을 닦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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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유순예


무릎 꿇지 않아도 됩니다
서 계신 그 곳에서
눈길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두 번 스친 인연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만나고 만날 것입니다
지금처럼 통하는 날, 주저앉아
그대 입김 내가 마시고
내 향기 그대가 마실 것입니다
부허한 기운 거나하게 취하거든
한철만 허락받은 삶도 뽐낼만하더라고
그대 머물다 간 자리에
몇 글자 써서 흙으로 덮어 두겠습니다.

....................................................

사랑은 마주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주하며 느끼고, 통하고, 취하면서 사랑이 익어간다.


사랑은 참고, 마르고, 멍들고, 아파하며 식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면
사랑은 깨진다.
그리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것을 맹서(盟誓)하면
사랑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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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

1960-70년대 우리들의 간난한 삶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
그의 글엔 쓸쓸함과 고통스러움, 절망과 좌절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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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쓸쓸하던 풍경


                          박남준

 
길섶에 쑥부쟁이 하얀 취꽃 자욱하게 눈물지고요
한 세월 백발의 머리 풀던 억새들의 목 긴 행렬이
상여길로 서럽게 밀려왔어요
이제 와서 옛사랑을 잊는다고 그리 잊혀지는가요
이름 부르며 이 들길을 걸어 첫눈이라도 올 듯한데
단풍의 숲은 두 눈을 가려 막막한 길을 묻고
옛날은 오지 않는 님처럼 그리웠어요
............................................................

쑥부쟁이와 억새와 바람의 가벼운 실랑이
가. 을. 비. 사이로
써억, 다가서는 겨울 걸음걸이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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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공광규


아내를 들어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두 마리 짐승이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고
또 한 마리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다


먹이를 구하다
지치고 병든 암사자를 업고
병원을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

최근에 심하게 아프거나,
갑작스레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소식이 이어졌다.


가능하면
오래 살아야 한다.
그것도 반드시 건강하게...

제 명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하기만이라도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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