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을 복사하다


                            이화은 
 

예술의 전당에서 이만 원 주고
클림트의 키쓰 복사본을 사 왔다
트윈 침대 만한 북쪽 한 벽에
햇솜 같은 할로겐 불빛을 짙게 깔고
그들을 눕혔다 이건 아니다
너무 진부했다
매양 여자가 아래에 깔리는 체위
뒤집어 여자를 위로 올렸다
마침 티브이에서 못 생긴 여자가
여성 상위에 대해 침을 튀기고 있다
못생길 수록 위로 올라가고 싶어한다고
이 시각부터 그렇게들 생각한다면
고즈넉이 남자의 입술을 먹고 있는
이 여자는 너무 아름답다
다시 일으켜 세웠다
불빛이 주르르 발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체위에 관해서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 입맞춤이 끝나고 그들은 눕던가
헤어져 돌아가던가 할 것이다
한국 영화처럼
끝까지 다 말해 버리지 말자 하지만
이 숨막히는 정적
한순간만은 다시 복사해
내 가장 숨막히는 시간 속에
걸어두고 싶다
.......................................................

숨이 차도록 가슴 벅차오르던 순간,
그 순간을 기억해 보려 애를 써본다.
언제였던가?
아니 무엇이었던가?


숨막히는 한 순간을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가끔은 시 한 편 읽어 보기도 만만치 않다.

여유란 가지려고 갖게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주어지지도 않는 듯 하다.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그냥 '짬' 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잠깐 짬을 내서 이 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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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


                이준관


아픈 데는 어떠냐고
걱정스레 묻는 친구의
전화 한 통


보고 싶다
단 한 줄 적혀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


인생에서
그 한 통이면
충분하다
물 한 통처럼
..................................

난 네 편이다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누구 딸이냐 물으면
엄마 딸이라고
주저없이 답해주는
진실한
맘 한 통...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이재무


늦도록 내 눈을 다녀간 시집들 꺼내놓고 다시 읽는다
한때 내 온몸의 가지에 붉은 꽃 피우던 문장들
책 속 빠져나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울음은
그저 울음일 뿐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못한다
마음에 때 낀 탓이리라 돌아보면 걸어온 길
그 언제 하루라도 평안한 날 있었던가
막막하고 팍팍한 세월 돌주먹으로 벽을 치며
시대를 울던, 그 광기의 연대는 꿈같이 가고
나 어느새 적막의 마흔을 살고 있다
적을 미워하는 동안 부드럽던 내 마음의 순은
잘라지고 뭉개지고 이제는 적보다도 내가 나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도 그 누구처럼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돌멩이를 쥘 수가 없다
과녁이 되어버린 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동안
뿌리 잃은 가지처럼 물기 없는 나날의 무료
내 몸은 사랑 앞에서조차 설렘보다는
섹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질 좋은 밥도
마음의 허기 끄지 못한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늦도록
잘못 살아온,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운다

...............................................................................

무엇 하나 올곧게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두루뭉술...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반문해보니
역시 어정쩡한 대답이 돌아온 듯 만듯 되돌아온다.
늦은 밤,
시인의 회한이 한줄 한줄
고스란히 내 맘에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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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오후 내내 눈이 내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똑같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운
하얀 눈가루 눈가루...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 가득 뿌려져 있는 듯 했다.
이러다 눈 앞이 모두 하얗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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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로 서서


                      이재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다.
여름날 생의 자랑이었던
가지의 꽃들아 잎들아
잠시 안녕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을 위해
지금은 작별을 해야 할 때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분분한 낙엽,
철을 앞세워 오는 서리 앞에서
뼈 울고 살은 떨려 오지만
겨울을 겨울답게 껴안기 위해
잎들아, 사랑의 이름으로
지난 안일과 나태의 너를 떨군다.

.......................................................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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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김지하


지나가는 걸 붙들 순 없다
별이 뜨길래
밤하늘 쳐다보고
서편으로 달이 지길래
서편을 노을마다 뛰는 가슴으로
미리 향했던 때가 지나간다

 
때론 국밥집
때론 앉은뱅이 악사를 찾아
공연히 장터 헤매는 요즈음
외마디 기인
비명이 나를 뺏던 그때마저
지나간다 지나간다

 
조금 낮은 가을바람에도
가죽장갑을 끼는 요즈음
나 없이
내가 나를 생각던 때는
훨씬 지나 저기 달아난다

 
속으로 묻건대
무엇이 또 남아
언제 나를 또 지나갈까

 
지나가는 걸
스스로 지나칠 일만 남았다.
........................................

시가
내 일상이 되고
힘이 되었다.

 

아직 읽지 못한
천 편의 시가 남았다.

 

내게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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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김용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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