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을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긴 휴가를 마치고 나니,
아쉽기도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기도 하다.
아마도 여러가지 이유로 멀리 가지 못한 휴가여서일게다.


하지만 나름 아주 편안한 휴가였다.
아이들과 보낸 시간도 많아 좋았고,
말 그대로 그냥 쉴 수 있는 휴가였다.


그래도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월급쟁이다 보니 좀 아쉽긴 하다.
나도 늘, 여행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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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욕


                        김지유


이쁜이 수술을 끝내고 돌아온 그녀가
펄펄 끓는 물로 소독을 한다
막 탯줄을 끊긴 아기가 목욕하듯
새로 태어난 그녀의 가랑이
넓어지고 늘어진 인생 바싹 죄어
떠나간 젊은 애인을 부르려나
열기에 움찔 놀라 두 눈 질끈 감고
다리에 돋는 소름에 담배 한 가치 빼문다
뜨거움에 찔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하얀 엉덩이를 주저앉힌다
아랫도리가 익어가며 죄어올수록
얼굴의 주름까지 잘라낸 듯 착각도 드는데
몇 모금 깊게 빤 꽁초를 좌변기에 던져 넣으며
좁은 대야에 엉덩이를 들이민다
맹렬한 뜨거움의 첫맛만 참고나면
덧난 사랑마저 소독 돼 새살이 돋을 듯한데
새로운 몸으로 맞이할 첫 사내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마저 들어
그렇게 속고도 심장의 하초를 벌리려는
마음만은 늘 팽팽하게 조이는
정마저 질기게 탄력이 붙어 탱탱한
그녀가 피맺힌 사타구니를 좌욕 중이다
........................................................................

팽팽하게 당겨진 아랫도리로
더 커다란 사내를 깔고 앉으면
아래부터 밀려 올라오는
희열에 몸부림치게 될는지...


마음이 차 올라야
흥도 나고, 희열도 느끼고,
정화되는 법.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욕심을 깔고 앉으면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내게 살아야 할 하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 곁을 말없이 지켜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그저 느낄 수만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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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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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일기


                    이해인

 

비 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

기나 긴 비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사나운 빗줄기에
시름마저 깊어져
자꾸만 젖어가는 어깨
자꾸만 되뇌어지는 상념들


눅눅해진 마음 한 곁에 촛불 밝혀 줄,
시름 한 잔 함께 기울일
따스한 햇살 같은 사람이
그리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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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치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만나면 항상 기분 좋은 사람,

언제든 어디서든

흉금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 이유가

네 탓일지, 내 탓일지 따지기 전에

, 쉽지 않은 일.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오늘 밤

흠뻑 취해도 좋으련만.

 

산행 2

 

                  마종기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 길.

......................................................................

배낭 메고 산 길을 걷다 보면
그 모양새가 우리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발걸음도 가볍고 즐거울 때가 있는가 하면
힘들고 지칠 때도 있다.


바삐 걸음 재촉해 걷고 또 걷다가
쉬기 위해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그제서야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오고
그제서야 어디 쯤 왔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는...


그래서 잠시라도 쉬어야 하는...
그래야 발걸음이 좀 가벼워지는...

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

오늘도 비

이어지는 비에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고

 

오랜만에 차를 한 잔 해야겠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고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누린 것이 언제였지

한동안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지

 

여유로움은 어쩌면

무수한 번거로움이 주는

작은 혜택

 

오늘은 기어코 차 한 잔 마셔야겠다

 

이것 저것 꺼내고, 챙겨 놓고, 물을 끓이고, 차를 꺼내고, 찻잔을 닦고

채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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