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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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김명은


어떤 기다림이 지쳐 무료가 되는지,
가끔씩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
지나가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깜박이는 신호등 네 길거리지만
나는 너의 행간이 아니라서
비켜섰다가 돌아오는 길,
겨우내 키를 움츠려 넘보지 못했던
엄동의 담장 저쪽, 못 지킨 약속 하나 있어
끝끝내 봄 밀려오는지,
까치발로 그 추위 다 받들어
가장 높은 가지 끝으로 목련 한 송이 피어난다.
다시 며칠 사이에도 내내 할 일이 없어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면
건답 위 봄 파종같이 뿌려진 인파들,
무더기 밀린 약속 한꺼번에 치러내려는 듯
만개의 목련 길바닥까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세상은 참 바쁘다, 어느 사이 나는
얼음의 문신 홀로 몸 속에 새겨넣었는지.
해동이 안 되는 기다림과 권태 속으로
느릿느릿 시건이 가 닿는 저 건너 공터 어디쯤
겨우내 짓고 있었던 마음의 폐허,
그 얼음집 다 세우기도 전에
어느개 끈을 끊고 개가 사라져버린 골목 입구를
혼자서, 혼자서 우두커니 지켜본다.
......................................................................

시인은 두 눈으로 참 많은 것을 본다.
몸 하나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한 순간,
이미
스무 줄을 훌쩍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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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강현덕


낙동강 물안개에
질식이라도 했는지
한낮의 미루나무
눈도 뜨지 못한다
기차는 오지를 않고
철컥철컥 오지를 않고


긴 의자에 삐죽 나온
못 같은 나를 돌아보다
안개 속에 감추어 둔
나의 아침을 생각하다
한림정 작은 역사에 기대
널 꿈꾸려 잠들다

....................................................

나른한 하늘 빛,
더위 먹은 바람,
열기로 가득한 태양 아래
모두, 정!지!


머릿속마저 멈춰버린 오후,
널 꿈꾸려 잠이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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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

전적으로 누구의 편이 되는 것...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평생토록 내 편이 되어주면 좋겠다.
나 역시 네 편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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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흙

 

                        조은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
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
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은 그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

인생은 언제나
초행(初行)길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래서 헤매는 것이 당연한,


물어서 가고

때론 돌아가야만 하는,
그러다 지치면 잠시 쉬어가는,
낯설기만 한
초행(初行)길


누군가 옆에 있으면 그것으로 든든한,
함께 갈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초행(初行)길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 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런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도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

간밤에 휘몰아치던 비바람도 잦아들고
빗줄기도 어느새 차분해졌다.


길이 모두 젖어있다.
그 길을 내려다 보며 흥얼거리는 노래
노래의 제목도 부른 이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한동안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노래


문득 누군가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길이 모두 젖어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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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를 쓰는 건


                            조병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마음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삶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세상을 노래하는 이다.


입하나 뻥끗 않고 노래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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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가끔 올리는 내 일상의 기도처럼

문득 네 생각이 나면

손을 모으거나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잘 살아라 한다.

 

오늘도

생각했다,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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