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되 무게의 그늘이다
..............................................................

무엇이든 어디 한 번에 다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발 한 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그걸 꽃이 핀 걸 보고서야 알았는데...


그런가 싶으면 또
온 등짝이 시릴만큼
날이 춥다.


오늘도 그런 날이어서
봄이 오긴 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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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오탁번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아
삼겹살 곱창 갈매기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며 노래했는데
봄 여름 지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간 영안실에서나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 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식구로 맞이하는
아들 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자주 만나자고
헛 약속한 친구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만이랴

...................................................

언젠가부터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다음엔 꼭 만나자 약속하던 손길이
마지막 온기였던 적도 있다.


이젠 그런 헛 약속이 더 많아지겠지.
그래도...
또 만나자 약속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는 안되겠지.
그러면 더 서운하겠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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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물리학


                        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 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에게
이젠 멀리 떠난다는
문자 한 통이 반짝 왔다.


잠깐동안 그걸 보다가
차라리 문자를 보내지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다.


답장을 꾹꾹 눌러 보냈다.
잘 살아라...

버튼을 꾹꾹 누르는 동안,
어딘가 꾹꾹 뭉쳤던 것이
눈구멍으로 뜨끈하게 솓더니
버썩 마른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른다.


다시 답장이 오진 않았지만
자꾸만 친구 목소리가 귓가를 맴맴 돈다.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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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은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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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박완호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

 

가끔, 아주 가끔씩은 챗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어디로든 멀리 가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공간적으로 '멀리'는 아니더라도, 일상을 탈출해서 어디론가를 향해서 떠나고 있음을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 공간을 벗어나지 못해 어디론가로 가고 있지 못하더라도 일상을 잠시 잊고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간이 아릿한 추억과 맞닿아 살짝 찌릿해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


이 시가 그러하다.
감각적이고 함축적인 짧은 한 문장이 수많은 장면과 겹치면서 아련한 추억속의 감각을 살짝살짝 일깨우고, 야릇한 향기를 은근히 뿜어낸다.

글을 읽다보면 저 아래에서 묵직한 자극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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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중심


               이화은

 
꽃은
그 꽃나무의 중심이던가
필듯말 듯
양달개비꽃이
꽃다운 소녀의 그것 같아
꼭 그 중심 같아
中心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흘러와 있는가
꿈마저 시린
변두리 잠을 깨어보니
밤 사이 몇 겁의 세월이 피었다 졌는지
어젯밤 그 소녀 이제는 늙어
아무 것의 한복판도 되지 못하는
내 중심 쓸쓸히 거기에
시들어
...............................................................................

곁을 지키며 바라봐주는 것의 든든함을
마음 한 장 얹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고마움을
너를 통해 느끼곤 했었다.


지금 네가 내 곁에 없어도
어딘가 있을 테니...
그것도 아주 잘 있을 테니...


그것이면 충분하다.

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

 

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내가 가진 것, 가질 수 있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꺼내본다.
참으로 변변히 잴 것도 없는 품새에
펼쳐보기도 부끄러워 얼른 걷어치운다.


10년을 키운 화초들은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를 갖춘 것들도 좀 있다 싶은데,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고, 예전 사진을 보니 나는 10년동안 늙기만 했다.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 나니,
자작나무 같은 시인은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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