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가리왕산에 기도 다녀오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쉴 틈이 없다.
이제 자식들이 모두 중년이 됐건만, 여전히 물가에 나앉은 토끼 새끼같은 자식들...

그들을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하셨을테니, 당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뿌듯함이 그리고 자부심이 묻어난다.
한참만에 얘기 보따리를 다 풀어놓고서야 스스로도 매우 만족스러우신지 목소리에 한껏 여유로움과 보람이 느껴진다.


당신이 자식을 잘 두긴 했다고......
주변 이웃들도 당신 속이 제일 편하지 않느냐고 부러워들 하신단다.


기가 막히게 맛있는 사과 한 박스와 이제껏 이처럼 빛깔 좋은 것을 본 적이 없는 고춧가루 한포대까지 추석에 다 들고 오시겠단다.
어느새 고희가 가까운 노인네가 다 된 어머니의 때아닌 힘자랑과 자식자랑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보고 싶은 마음

                         

                          고두현


휴대폰 없이 산에서 지내는 동안
하늘색 공중전화가 있는
절 마당까지 뛰어갔다가 동전은 못 바꾸고
길만 바꿔 돌아올 때


보고 싶은 마음 꾸욱 눌러
돌무지에 탑 하나 올린다

...............................................

누가 쌓았는지
언제부터 쌓였는지도 모르는
돌무더기


누구의 마음인지
저 속엔


얼마나 많은 바람이
얼마나 많은 그리움이
얼마나 많은 삶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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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비 내리고 - 편지 1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사랑은 아프다.
사랑하니까 시리고 아프다.
사랑이려니 먹먹하고 시리고 아프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되기까지
인내하고 용서하고 다독여야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만큼인지


무엇 하나 지켜내기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만큼인지


사랑은 먹먹하다.
사랑하니까 시리고 먹먹하다.
사랑이려니 아프고 시리고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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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빈 마음 속 바람

 

                                정경혜


바람, 가버렸다고
아버님 낮술 빌미로 몰아치실 때
텃밭 접시꽃도 졌다


뒷덜미가 서늘하다


달빛에 논물 반짝이는 동구밖
밤안개 가득한 들녘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

큰 바람이 지나고 나니 완연한 가을 하늘이다.
푸르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하늘...


어쩌면 슬프고 외로웠을 바람속의 아픈 기억이
말끔히 씻기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 하늘은 참 무심히도 푸르다.

서흥 김씨 내간

                            

                         이동순
 

그해 피난 가서 내가 너를 낳앗고나
먹을 것도 없어 날감자나 깍아먹고
산후구완을 못해 부황이 들었단다
산지기집 봉당에 멍석 깔고
너는 내 옆에 누워 죽어라고 울었다
그해 여름 삼복의 산골
너의 형들은 난리의 뜻도 모르고
밤나무 그늘에 모여 공깃돌을 만지다가
공중을 날아가는 포성에 놀라
움막으로 쫓겨와서 나를 부를 때
우리 출이 어린 너의 두 귀를 부여안고
숨죽이며 울던 일이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네 아비는 빈 마을로 내려가서
인민군이 쏘아 죽인 누렁이를 메고 왔다
언제나 사립문에서 꼬릴 내젓던
이제는 피에 젖어 늘어진 누렁이
우리 식구는 눈물로 그것을 끓여 먹고
끝까지 살아서 좋은 세상 보고 가자며
말끝을 흐리던 늙은 네 아비
일본 구주로 돈 벌러 가서
남의 땅 부두에서 등짐 지고 모은 품삯
돌아와 한밭보에 논마지기 장만하고
하루 종일 축대쌓기를 낙으로 삼던 네 아비
아직도 근력 좋게 잘 계시느냐
우리가 살던 지동댁 그 빈 집터에
앵두꽃은 피어서 흐드러지고
네가 태어난 산골에 봄이 왔구나
아이구 피난 피난 말도 말아라
대포소리 기관포소리 말도 말아라
우리 모자가 함께 흘린 그해의 땀방울들이
지금 이 나라의 산수유꽃으로 피어나서
그 향내 바람에 실려와 잠든 나를 깨우니
출아 출아 내 늬가 보고접어 못 견디겠다
행여나 자란 너를 만난다 한들
네가 이 어미를 몰라보면 어떻게 할꼬
무덤 속에서 어미 쓰노라
.....................................................................

아, 우리네 삶

차라리 눈물 겹다.

그리고 너를 위하여


                               이수익


타오르는 한 자루 촛불에는
내 사랑의 몸짓들이 들어 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하여
끓어오르는 백열의 침묵 속에 올리는 기도,
벅찬 환희로 펄럭이는
가눌 길 없는 육체의 황홀한 춤,
오오 가득한 비애와 한숨으로 얼룩지는
눈물,
그리고 너를 위하여
조금씩 줄어드는 내 목숨의 길이.
...................................................

가끔씩 무겁게
휘청이는 촛불


내 뜨거운 시선을
불 한 가운데에 꽂는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희열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몸짓
터질 듯 요동치는 불꽃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눈물
눈물...


하지만
고요함은 단 한 순간도
깨지지 않았다.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사랑하며 줄어드는 황홀한 잔치


한 순간도 기다림 없는 시간 속에서
기도하며 줄어드는 고귀한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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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날보다


                      이정하


그대는 아는가.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 했다는 것을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를 덮었다.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 이별을 두려워했더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별을 예감했기에 더욱 그대에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

얼마나 시간이 흐르면 영영 잊혀질까?

 

몇 백 통의 편지를 쓰고,
몇 천 시간의 그리움을 견디고,
몇 만 번의 기도를 올려야 잊혀질까?

 

얼마나 기다리면 깨끗히 지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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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연가


               고재종


저 미루나무
바람에 물살쳐선
난 어쩌나,
잎들에선 치자꽃향기.
저 이파리 이파리들
햇빛에 은구슬 튀겨선
난 무슨 말 하나.
뒷산에선 꾀꼬리소리.
저 은구슬만큼 많은
속엣말 하나 못 꺼내고
저 설렘으로만
온통 설레며
난 차마 어쩌나.
강물 위엔 은어떼빛.
차라리 저기 저렇게
흰 구름은 감아 돌고
미루나무는 제 키를
더욱 높이고 마는데,
너는 다만
긴 머리칼 날리고
나는 다만
눈부셔 고개 숙이니,
솔봉이여, 혀짤배기여
바람은 어쩌려고
햇빛은 또 어쩌려고
무장 무량한 것이냐.
..............................................

태풍이 연이어 지나가며
이곳 저곳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어마어마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하기만한 존재인가?


8월의 끝자락을 지나며
밤 공기가 차가워짐을 알겠다.
한 낮의 열기도 차츰 사그라 들고 있다.

오늘은 부쩍 하늘이 높아졌다.
시간 역시 한치도 거스를 수 없음을 안다.
우연히 열어 본 예전 앨범
10여년전 사진 속의 나는 무척 파릇파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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