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정 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주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무엇이 저리 사무치게 그리울까?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 속절없건만
싹 쓸어버리지 못하고
이제 모양새도 제대로 없는 그것을
또 다시 주섬주섬 주워 담고 있다.


                       이형기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 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

삶은 늘 혼자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사는 동안

고독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은 늘 초행이고 그래서 항상 낯설다.
어쩌면 사는 동안

끊임없이 길을 찾아 방황하고 헤맬 것이다.


삶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사는 동안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사는 동안 좀 덜 외로우라고
가는 동안 좀 덜 힘들게 가라고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그래, 인생은 단 한번의 추억여행이야


                                             김정한

                                 
눈물겹도록 미친 사랑을 하다가
아프도록 외롭게 울다가
죽도록 배고프게 살다가


어느날 문득
삶의 짐 다아 내려놓고
한 줌의 가루로 남을 내 육신


그래, 산다는 것은
짧고도 긴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처음에는 나 혼자서
그러다가 둘이서
때로는 여럿이서
마지막에는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산다는 것은
사실을 알고도 모른척
사람을 사랑하고도 아닌척
그렇게 수백번을 지나치면
삶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겠지


아~ 그때는 참 잘했어
아~ 그때는 정말 아니었어
그렇게 혼자서 독백을 하며 웃고 울겠지


아마도 여행 끝나는 날에는
아름다운 여행이기를 소망하지만
슬프고도 아픈 여행이었어도
뒤돌아보면 지우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겠지
짧고도 긴 아름다운 추억여행


그래,
인생은 지워지지 않는 단 한번의 추억여행이야

.......................................................................

어쩌면, 아니 언젠가는...
지난 시간은 모두 추억거리겠지
전부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만...


시간은 한 순간도 멈추는 일이없지
끊임없이 변화하지.


우리 삶도 마찬가지지.
변화하지 않고 멈춰 있는 일은 결코 없지.
내가 아무런 의미없이 흘려보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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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이병률

 

샀는지 얻었는지
남루한 사내가 도시락을 들고는
공원 의자 한쪽에 올려놓더니
가까이 있는 휴지통을 뒤져 신문지를 꺼낸 다음
한 치의 망설임없이 도시락을 엎는다
다시 음식을 담은 신문지를 잘 접어 보퉁이에 챙긴다
행복을 바라지 않겠다는 것일까


빨래를 개고 있는지
옷감을 만지고 있는지
그녀는 옷을 쥐고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는 것 같았다
만지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파르르 온몸을 떨더니 바늘로 생손가락을 찌른다
행복을 꿰매겠다는 것일까

 
어느 날 길이 나오듯 사랑이 왔다
사랑은 어떤 사랑이 떠날 때와는 다르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왔다
허나 저울은 사랑을 받치지 못했다
무엇이 뼈고 무엇이 살인지를 모르는 극지로 흘러갔다
상자를 받고도 열지 못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절벽에다 힘껏 던졌다
행복을 공중에 매달겠다는 것이었을까
..................................................................

행복은 과거의 어느 모퉁이부터
지금 여기까지 곳곳에 널려 있겠지.
기억 속에 남겨진 것도 있고
영영 잊혀진 것도 있겠지.


종종 그 추억거리가 행복인 건 맞지.
행복을 바란다고
누구나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


하지만 행복은 철저히 주문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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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도종환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

행복은 분명 과거의 어디엔가에 있다.
행복은 분명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이킬 수는 없어
이 순간의 소중함은 더 명백해진다.


이 순간의 행복에 최대한 집중하는 것
단 한 번뿐인 내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려니.

꿈꾸는 물


                      한광구


비 오시는 소리 들린다.
꿈이 마르는 나이라서 잠귀도 엷어진다.
아, 푸욱 잠들고 싶다.
한 사나흘 푸욱 젖어 살고 싶다.
..........................................................

주룩비를 맞고 산 길을 오른다.


이제는 많이 왔겠거니 싶었는데
한참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광이 발목을 묵직하게 잡는다.


축축히 젖은 배낭 잠깐 놓을 양이었는데
땅도 길도 모두 젖어
마땅히 내려 놓고 쉴 곳이 없다.


땀인지 빗물인지
자꾸만 눈두덩을 타고 흘러내려 눈을 가리고
비 맞은 옷과 배낭은 한없이 무겁다.


잠시의 휴식조차 변변히 찾을 길이 없으니
당장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솔솔 피어오른다.


얼마나 왔는지 알 필요가 없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니...
비는 계속 내려도 상관없다.
앞 길에 마음을 더 기울이는 게 맞으니...


수건으로 흐른 땀 쓰윽 한 번 훔쳐내고
풀린 허리끈 다시 바짝 졸라 매고
그새 조금 가뿐해진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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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도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너머 산 너머에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

언젠가부터 떠들썩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사라진 풀 숲에
한가한 귀뚜라미 소리가 나즈막히 들리고,

 

새벽부터 창문 두드리는 빗소리에

서둘러 잠이 깨고,


선잠을 채 털어내지 못한 맨 살에 닿는

서늘한 새벽공기에 소름이 돋는 걸 보니,


이제
가을이 오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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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그대 눈물을


                                    이정록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 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 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무리 올려다 봐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푸르름
가을로 접어드는 길 모퉁이
어디 쯤에 잠시 머물다.


시간이 가는 것은
자연히 알게 되는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것
일어서야 할 때,
용기 내어 뒤로 돌아 앉다.


눈을 감고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떠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
한 발 내딛다.


드디어
감사함의 바탕 위에
믿음의 기둥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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